현대문학 4강. 지금 세계는 무엇을 읽는가
어떤 책이 세계문학이 되는지는 작품의 힘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상과 번역과 서점 매대가 함께 정합니다.
풀고 시작
상이 그리는 세계지도
세계문학이라는 말은 넓지만, 실제로 어떤 책이 국경을 넘는지는 좁은 통로가 정합니다. 그 통로의 이름이 문학상입니다. 노벨문학상은 한 작가의 전 생애를 호명해 그의 나라 전체를 조명하고, 부커상은 한 권을 지목해 판매 부수를 자릿수 단위로 바꿔 놓습니다. 부커상은 2014년부터 영연방 중심의 국적 제한을 없애고 영어로 쓰인 소설 전체로 자격을 넓혔는데, 이 개방이 오히려 미국 소설의 비중을 키웠다는 비판이 곧바로 따라왔습니다. 문을 넓히면 힘센 쪽이 더 많이 들어온다는 것이죠.
권위는 흔들리기도 합니다. 2018년 스웨덴 아카데미는 내부 성추문과 정보 유출 문제로 그해 수상자 발표를 미뤘고, 이듬해에 두 해분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그중 페터 한트케의 수상은 발칸 전쟁을 둘러싼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격렬한 반발을 불렀습니다. 작품과 작가의 정치를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광장으로 나온 것입니다.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어로 쓰인 문학이 통로를 통과한 사건이었고, 그 통과에는 번역이라는 관문이 반드시 끼어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이름이 표지로 올라옵니다
오랫동안 번역가는 판권면 구석에 작은 글씨로만 존재했습니다. 잘된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는 통념 때문이었죠. 이 통념이 흔들린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2021년 여러 작가와 번역가가 참여한 공개 서한이 출판사에 요구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번역가의 이름을 표지에 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변화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계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언어의 문학이 세계에 도달하려면 그 언어를 다루는 번역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름도 지분도 없는 노동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동시에 번역가의 재량을 둘러싼 논쟁도 커졌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으로 2016년 국제 부커상을 받은 뒤, 번역이 원문에서 얼마나 멀어져도 되는지를 놓고 한국과 영어권에서 오래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번역가가 보이게 되자 번역가의 선택도 함께 보이게 된 것이죠.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번역이 기계적 옮김이 아니라 해석 행위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나를 재료로 씁니다
1977년 프랑스 작가 세르주 두브로브스키는 자기 소설을 설명하려고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말을 만듭니다. 실제 자기 삶의 사실을 쓰되 소설의 언어로 쓰는 글쓰기죠. 이 형식이 21세기에 폭발합니다. 노르웨이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자신의 일상과 가족사를 여섯 권짜리 연작 『나의 투쟁』에 쏟아냈고, 기저귀를 가는 장면이 수백 쪽 이어지는 그 책은 뜻밖에도 나라 전체를 논쟁에 빠뜨렸습니다. 실명으로 등장한 가족과 지인의 삶은 누구의 재산인가라는 문제 때문이었죠.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는 조금 다른 자리에 섭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쓰되 자기 이야기로 끝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낙태, 계급 이동, 아버지의 죽음 같은 개인의 사건을 쓰면서 그것이 한 시대의 사회적 조건 안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함께 적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작업을 오토픽션보다 사회적 자서전에 가깝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문장의 형식으로 실행한 셈입니다.
지구가 등장인물이 됩니다
인도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2016)에서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진지한 현대 소설은 기후 위기를 거의 다루지 않았는가. 그의 진단은 형식에 있습니다. 근대 소설은 개연성 있는 일상과 개인의 내면을 다루도록 훈련되어 왔기에, 도시를 삼키는 규모의 사건은 진지한 소설이 아니라 장르물로 밀려났다는 것이죠.
지금은 그 경계가 무너지는 중입니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2018)는 나무를 배경이 아니라 시간 단위가 다른 주인공으로 세워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킴 스탠리 로빈슨의 『미래부』(2020)는 기후 정책 회의록과 소설을 뒤섞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E. Butler)가 1993년에 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기후 붕괴와 사회 해체를 그린 작품인데, 최근 몇 년 사이 예언서처럼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과학소설의 지위도 달라졌습니다. 류츠신의 『삼체』는 켄 리우의 영역본으로 2015년 휴고상 장편 부문을 받아 번역 작품으로는 처음 그 자리에 올랐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복제인간과 인공지능 친구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씁니다.
작은 언어가 통로를 여는 방식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목록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납니다. 2022년 국제 부커상은 기탄잘리 슈리의 힌디어 소설 『모래의 무덤』(Ret Samadhi, 데이지 록웰 번역)에 돌아갔습니다. 인도의 언어로 쓰인 작품이 이 상을 받은 첫 사례였죠. 2025년에는 바누 무슈타크의 칸나다어 단편집 『하트 램프』(Heart Lamp, 디파 바스티 번역)가 받았습니다. 인도 남부의 한 언어권 문학이, 그것도 단편집이 세계의 매대 앞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이 활짝 열린 것은 아닙니다. 영어권 출판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오랫동안 낮은 한 자릿수에 머물러 왔다는 지적이 반복됩니다. 게다가 상은 정전을 만들면서 동시에 좁힙니다. 심사위원 몇 사람의 취향이 한 언어권 전체의 대표 이미지를 결정하고, 그 이미지에 맞는 작품이 다음에 더 잘 번역되는 순환이 생기죠. 그래서 오늘의 독자에게 필요한 질문은 무엇이 좋은 책인가에 더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 책이 내 손에 오기까지 누가 무엇을 골라냈는가. 이 질문을 들고 다음 과목에서 우리는 읽기의 기술 자체로 넘어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문학상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읽을 책을 고르게 될까요. 알고리즘 추천은 상보다 나은 선별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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