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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3강. 이야기가 자기를 의심할 때

소설이 독자를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가 지금 속이는 중이라고 실토하기 시작합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메타픽션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소설의 특징으로 가장 정확한 것은 무엇일까요?
메타픽션은 허구의 환영을 유지하는 대신 스스로 허구임을 노출합니다. 화자가 서술 행위를 언급하거나 독자를 등장인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 보기의 자전적 글쓰기는 오토픽션 쪽 계보이며 4강에서 따로 다룹니다.

소설이 자기를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기본 약속은 창문이었습니다. 유리는 보이지 않아야 하고 독자는 그 너머의 세계만 봐야 하죠. 20세기 후반의 소설들은 그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화자가 지금 자기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중이라고 말하고, 결말을 두 개 제시하고, 각주가 본문을 잡아먹습니다. 이런 글쓰기를 메타픽션(metafiction)이라 부릅니다.

예고편은 훨씬 전에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1939)에서 세르반테스와 글자 하나까지 똑같은 돈키호테를 20세기에 다시 쓴 작가를 등장시킵니다. 같은 문장인데 3백 년 뒤에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뜻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텍스트의 의미가 문장 안에 붙박여 있지 않다는 이 농담이 뒤이은 수십 년의 실험을 예고합니다. 1967년 미국 작가 존 바스는 「소진의 문학」에서 재래식 소설의 가능성이 바닥났다고 진단했다가, 훗날 그 진단이 절망이 아니라 새 출발이었다고 스스로 정정합니다.

장치가 곧 내용이 될 때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1979)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은 칼비노의 새 소설을 사서 읽기 시작한다고. 여기서 당신은 수사가 아니라 진짜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책이 몇 장 넘어가면 제본 사고로 이야기가 끊기고, 다음 판본을 구하면 전혀 다른 소설이 나옵니다. 독자는 열 번쯤 도입부만 읽게 되죠. 읽고 싶은 마음이 계속 미끄러지는 그 상태 자체가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다른 쪽에서 판을 짭니다. 『창백한 불꽃』(Pale Fire, 1962)은 999행짜리 시 한 편과 그 시에 붙은 방대한 주석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주석자가 시와 아무 상관없는 자기 이야기를 밀어 넣기 시작하죠.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심지어 누가 무엇을 지어낸 것인지를 두고 비평가들의 해석은 지금도 갈립니다. 어느 하나가 정답으로 확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설계에 가깝습니다. 『롤리타』(1955)의 유창한 화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장을 그대로 믿는 순간 독자는 함정에 발을 딛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독자에게 판단의 몫을 떠넘기는 장치입니다.

저자가 죽고 독자가 태어납니다

1967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짧은 글을 씁니다. 작품의 의미를 작가의 의도에서 찾는 습관을 겨눈 글이죠. 텍스트는 무수한 인용이 짜인 직물이고, 그 실들이 모이는 곳은 작가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른다고 맺습니다.

곧바로 반론이 나옵니다. 미셸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1969)에서, 저자를 없앤다고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라는 이름은 텍스트를 분류하고 책임을 묻고 유통을 관리하는 기능이며, 그 기능이 사라지면 다른 통제 장치가 그 자리를 채운다는 것이죠. 두 사람의 차이는 오늘날 더 흥미롭습니다. 익명 계정의 글과 인공지능이 생성한 문장이 넘치는 시대에, 우리는 저자의 죽음과 저자 기능의 끈질김을 동시에 겪고 있습니다.

담이 낮아집니다

이 시기 소설들은 고급문학과 대중오락 사이의 담을 넘어 다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1980)은 중세 수도원 추리소설이면서 기호학 강의이고, 실제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앤절라 카터(Angela Carter)의 『피로 물든 방』(1979)은 푸른 수염과 미녀와 야수 같은 옛이야기를 다시 씁니다. 그 다시 쓰기에서 동화 속 순종적인 신부 자리에 다른 종류의 여자가 들어서죠.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1998)에서 시체와 개와 나무는 물론 빨강이라는 색깔까지 화자로 세워, 하나의 진실 대신 서로 어긋나는 목소리들을 늘어놓습니다.

캐나다 이론가 린다 허천(Linda Hutcheon)은 이런 작품들을 역사기술적 메타픽션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역사를 소설로 다루면서 동시에 역사 서술이라는 행위 자체를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1987)가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됩니다. 노예제의 기록이 남기지 않은 것을 소설이 불러내면서, 그 불러냄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도 함께 보여 주니까요. 여기서 패러디는 조롱이 아니라 비판적 인용에 가깝습니다.

유행이었을까, 도구였을까

비판도 거셌습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로 규정하면서, 패러디가 패스티시로 타락했다고 봤습니다. 겨냥할 규범이 사라진 채 옛 양식을 표면만 베끼는 흉내라는 것이죠. 그 결과 남는 것은 역사 감각의 마비라고 그는 경고했습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의 기획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일 뿐이라며, 이성을 통째로 포기하는 흐름에 반대했습니다. 모든 것이 구성물이라면 무엇에 근거해 부정의를 고발하느냐는 물음도 계속 제기됐습니다.

1990년대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안에서 문제를 지적합니다. 냉소적 아이러니가 처음에는 위선을 깨는 무기였는데, 이제는 광고와 텔레비전이 그 어법을 삼켜 버려 아무것도 깨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가 제안한 다음 수는 진심으로 돌아가는 위험을 감수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산은 남았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여러 목소리로 갈라지는 서술, 장르 혼합, 역사 소설의 자의식은 이제 실험이 아니라 기본 도구가 됐습니다. 4강에서 볼 오늘의 세계문학은 이 도구들을 당연하게 쓰면서 전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가 던지는 요점은 무엇일까요?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와 글자까지 동일한 돈키호테를 20세기에 다시 씁니다. 같은 문장이 시대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르게 읽힌다는 것이죠. 의미가 문장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 발상이 이후 메타픽션 실험을 예고합니다.
문제 2.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대한 푸코의 응답은 무엇이었을까요?
푸코는 저자를 낭만적 창조자가 아니라 담론을 묶고 통제하는 기능으로 봤습니다. 그 기능이 없어지면 다른 통제 장치가 자리를 채운다는 것이죠. 두 사람은 저자 중심주의를 함께 의심했지만 결론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문제 3. 린다 허천이 말한 역사기술적 메타픽션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이 계열의 작품은 역사를 불러내면서 그 불러냄의 불완전함까지 함께 드러냅니다. 노예제가 남기지 않은 기록의 자리를 소설로 채우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자주 예로 거론됩니다. 고증 소설과는 지향이 다릅니다.
문제 4. 제임슨이 패러디와 구별해 패스티시라 부른 것은 무엇일까요?
제임슨은 패러디에는 겨냥하는 규범과 비판의 각도가 있지만 패스티시에는 그것이 없다고 봤습니다. 양식을 향수의 상품으로 소비할 뿐이며 그 결과 역사 감각이 마비된다는 경고입니다. 반대로 허천은 이 시기 패러디를 비판적 인용으로 평가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삶과 의도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될까요, 방해가 될까요. 두 입장 중 하나를 골라 사례를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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