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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와 비극 1강. 가장 오래된 이야기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장편 이야기는 정복담이 아니라, 죽지 않는 법을 찾아 나선 왕의 실패담입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872년 조지 스미스가 대영박물관의 점토판에서 해독해 유럽을 뒤흔든 대목은?
스미스가 읽어낸 것은 배를 짓고 물이 세상을 덮고 새를 날려 뭍을 확인하는 홍수 이야기였습니다. 성경보다 훨씬 오래된 판본이 나온 셈이라 충격이 컸습니다. 법전이나 계보 점토판도 실제로 쏟아져 나왔지만 사람들을 흔든 것은 홍수 대목이었습니다.

진흙 속에서 돌아온 왕

1853년 이라크 북부 니네베의 흙더미에서 아슈르바니팔 왕의 서고가 나옵니다. 쐐기문자 점토판 수만 조각이 런던으로 실려 갔지만, 그것을 붙이고 읽어낼 사람이 없어 상자째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1872년, 지폐 인쇄공으로 일하다 독학으로 쐐기문자를 익혀 박물관 조수가 된 조지 스미스가 한 조각을 읽다가 얼어붙습니다. 홍수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흥분한 나머지 옷을 벗어 던지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는 일화가 동료들의 증언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돌아온 작품이 『길가메시 서사시』입니다. 주인공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이고, 오늘 우리가 읽는 표준판은 신-레케-운닌니라는 서기의 편집본으로 전해집니다. 3천 년 넘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가 한 세대 만에 세계문학의 첫 페이지로 올라선 것이죠.

죽음을 배운 왕

길가메시는 처음에 폭군입니다. 신들이 그를 견제하려고 야생에서 자란 인간 엔키두를 만들고, 둘은 맞붙어 싸우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야기가 어디로 꺾이는지를 조금 말하니, 직접 읽는 맛을 아끼고 싶다면 다음 절로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자기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실감하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세상 끝으로 떠납니다. 그 여행이 무엇을 남기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다만 이 서사시가 여태 읽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최초의 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사자를 맨손으로 잡고 삼나무 숲의 괴물을 베지만, 정작 이길 수 없는 상대 앞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무너집니다. 영웅담의 형식을 빌려 영웅이 아닌 조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뒤에 올 모든 비극의 먼 조상 격입니다.

노래는 어떻게 저장되는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도 비슷한 수수께끼를 안고 있었습니다. 문자가 흔치 않던 시대에 한 사람이 이 방대한 시를 지었다는 게 가능할까요. 미국 학자 밀먼 패리는 1930년대에 답을 찾으러 그리스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로 갔습니다. 글을 모르는 남슬라브 구술 시인들이 몇 시간짜리 서사시를 즉석에서 부르는 현장을 녹음한 그는, 비밀이 정형구(formula)에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발 빠른 아킬레우스"나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 같은 상투적 수식은 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운율의 빈칸에 딱 맞게 재단된 조립 부품이었습니다. 시인은 시를 외운 것이 아니라 부품으로 짓는 법을 익힌 것이죠. 패리는 30대 초반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제자 앨버트 로드가 『이야기 가수』(1960)로 이론을 완성합니다. 그 뒤로 호메로스는 한 천재의 이름이 아니라 오랜 구술 전통의 이름일 수 있다는 관점이 널리 퍼졌습니다. 물론 현존 판본의 정교한 짜임새는 뛰어난 개인의 손을 가리킨다는 반론도 여전히 힘이 셉니다.

문자 이전의 도서관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긴 노래를 만들었을까요. 고전학자 에릭 해블록은 서사시가 문자 없는 사회의 백과사전이었다고 봅니다. 배를 모는 법, 장례를 치르는 절차, 왕가의 계보, 손님을 대접하는 예법이 이야기 속에 박혀 있고, 운율과 반복은 그 정보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압축 포맷이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시인을 이상 국가에서 내보내려 한 것도, 철학이라는 새 기억법이 옛 기억법과 자리를 다툰 사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서사시를 정보 저장 장치로만 보면 아킬레우스가 짧고 빛나는 삶과 길고 무명한 삶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면의 무게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첫 페이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는 자리는 사실 여러 후보가 나눠 갖고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규모와 영향력에서 어느 서사시에도 밀리지 않고, 서아프리카 만데족의 『순디아타』는 그리오라 불리는 전문 구술 예인들이 20세기까지 살아 있는 노래로 전했습니다. 우리가 호메로스를 먼저 배우는 것은 그가 첫 번째여서가 아니라 유럽 학교가 오래 그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그 서사시의 영웅들이 무대 위로 끌려 나와 산산이 부서지는 장면, 그리스 비극을 봅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길가메시 서사시』가 19세기 유럽에서 큰 충격을 준 직접적 이유는?
스미스가 해독한 대목은 창세기 노아 이야기와 뼈대가 같은데 훨씬 앞선 판본이었습니다. 성경 서사가 고대 근동의 넓은 이야기 바다에서 나왔다는 뜻이 되니 파장이 컸습니다. 무덤이나 법전 발굴은 이 충격과는 다른 사건입니다.
문제 2. 밀먼 패리가 호메로스를 연구하려고 유고슬라비아의 구술 시인을 녹음한 까닭은?
패리의 질문은 문자 없이 그 긴 시가 가능한가였고, 답은 문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가수에게 있었습니다. 그가 확인한 것은 시인이 완성된 시를 암기하는 대신 정형구를 조립해 즉석에서 짓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제 3. "발 빠른 아킬레우스" 같은 반복 수식어를 구술 정형구 이론이 설명하는 방식은?
정형구는 특정 위치에 딱 들어맞는 길이와 운율을 가진 조립 부품입니다. 덕분에 시인은 다음 대목을 생각하면서도 노래를 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찬사나 필사 실수로 보면 왜 하필 그 자리에 반복되는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문제 4. 서사시를 문자 이전 사회의 기억 장치로 보는 해블록식 관점의 핵심은?
항해술과 장례 절차와 계보 같은 지식이 이야기에 박혀 전승됐고, 운율은 그것을 잃지 않게 하는 기술이었다는 관점입니다. 다만 서사시를 정보 창고로만 보면 인물의 선택이 주는 문학적 무게를 놓친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정형구로 즉석에서 지어지는 노래에도 '작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목록은 무엇이 오래되었는지가 아니라 누가 오래 가르쳤는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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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