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1강. 그 일 이후에 쓴다는 것
학살이 끝난 자리에서 문학은 두 번 시험을 칩니다. 쓸 수 있는가,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척하지 않고 쓸 수 있는가.
풀고 시작
야만이라는 말은 무엇을 겨눴을까
1949년에 쓰고 1951년에 발표한 짧은 글 「문화비판과 사회」에서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한 문장을 남깁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문장이죠. 이 문장은 20세기 후반에 가장 자주 인용되고 가장 자주 오해받은 문장에 듭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창작 금지령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글의 맥락을 따라가면 그가 겨눈 것은 시가 아니라 문화 자체의 태연함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 독해가 확정된 정답은 아니어서, 서정시라는 장르 자체를 겨눴다고 읽는 쪽도 있습니다.
반례는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체르노비츠 태생의 독일어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새벽의 검은 우유"라는 구절로 시작해, 수용소를 독일어의 리듬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가해자의 언어로 피해를 쓴 것이죠. 아도르노 자신도 나중에 물러섭니다. 『부정 변증법』(1966)에서 그는 계속되는 고통에는 표현될 권리가 있다고, 고문당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를 권리를 갖는 것과 같다고 씁니다. 금지가 아니라 경계선이었던 셈입니다. 쓰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은 쓰지 말라는.
익사한 자는 증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화학자였습니다. 1944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그를 살린 것도 화학이었죠. 실험실 노역에 배치된 덕에 마지막 겨울을 견뎠고, 1947년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è un uomo)를 냅니다. 그런데 초판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아직 들을 준비가 안 됐던 것이죠.
레비의 문장은 실험 보고서처럼 차갑습니다.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관찰하고 기록하죠. 그 절제가 오히려 독자의 방어를 무너뜨립니다. 마지막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에서 그가 꺼낸 개념이 회색지대(zona grigia)입니다. 수용소에는 순수한 가해자와 순수한 피해자만 있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관리하고 시신을 옮긴 수감자들이 있었습니다. 레비는 그들을 심판하기를 거부합니다. 그 자리에 서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더 무거운 말을 덧붙입니다. 온전히 증언할 수 있었을 사람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언제나 대신 하는 증언이라는 이 자각이 증언 문학의 윤리적 중심이 됩니다.
레비 옆에 나란히 놓을 목소리로 샤를로트 델보(Charlotte Delbo)가 있습니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체포되어 1943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그는 1946년에 쓴 원고를 20년 가까이 서랍에 묵혔습니다. 이 글이 시간을 견딜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나온 『우리 중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리라』(Aucun de nous ne reviendra, 1965)는 산문과 시를 섞어 갈증과 추위의 감각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번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전혀 다른 응답이 나옵니다. 아일랜드 사람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전쟁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가 시골로 도피해 지냈고, 전후에는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1952년에 출간되어 이듬해 파리에서 초연됩니다. 두 남자가 나무 한 그루 아래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죠. 비평가 비비언 머시어는 이 연극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이라고 요약했습니다.
파리 초연은 야유와 찬사를 동시에 불렀고, 1956년 미국 마이애미 공연에서는 상당수 관객이 중간에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샌쿠엔틴 교도소 공연에서 재소자들은 조용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기다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부조리극은 의미가 무너진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무대 위에 그대로 올려놓는 형식입니다. 재난을 매끄러운 이야기로 봉합하면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거짓이 됩니다. 베케트는 봉합하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검열된 섬광
일본에는 또 다른 종류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1945년 8월을 겪은 사람들이 곧바로 쓰기 시작했지만, 연합군 점령기의 언론 통제 아래에서 원폭 피해를 정면으로 다룬 글은 발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하라 다미키(原民喜)의 「여름 꽃」(夏の花)이 1947년에야 세상에 나온 사정이 그렇습니다. 그는 형용사를 거의 쓰지 않고 본 것을 적었습니다.
이 계보는 오타 요코(大田洋子)의 『시체의 거리』,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검은 비』(黒い雨)로 이어집니다. 『검은 비』는 폭발의 순간보다 몇 년 뒤 한 집안의 혼담이 어긋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피폭이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차별로 이어지는 긴 시간이라는 것이죠.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노트』(1965)에서 피폭자를 성인으로 만들지도, 반핵의 상징으로 소비하지도 않으려 애씁니다. 겪지 않은 사람이 겪은 사람을 소재로 삼을 때 생기는 위계를 계속 의식한 것이죠.
재현이라는 어려운 일
여기서 전후 문학의 공통 질문이 드러납니다. 겪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쓸 수 있는가, 쓴다면 어디까지 아름답게 만들어도 되는가. 한쪽에는 잘 만든 이야기가 재난을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바꾸고 감동이 이해를 대신해 버린다는 의심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침묵이 경건해 보여도 결국 부정론자에게 빈자리를 내준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어느 쪽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 채 긴장이 유지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기 문학의 성과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재난이 아니라 지배를 겪은 쪽이 어떤 언어로 응답했는지를 봅니다. 그때도 같은 질문이 모양을 바꿔 돌아옵니다. 누가, 누구의 말로 말하는가.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겪지 않은 사람이 남의 참사를 소설로 쓸 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선은 누가 정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