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탄생 2강. 소설이 상품이 되던 때
소설은 예술로 대접받아서 퍼진 것이 아니라, 잘 팔려서 살아남았습니다.
풀고 시작
책이 싸지고 읽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소설이 폭발한 이유를 천재의 등장에서 찾으면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먼저 바뀐 것은 산업 조건이었습니다. 1695년 출판 허가법이 갱신되지 않으면서 사전 검열 체제가 무너졌고, 1710년 앤 여왕 법으로 저작권이 제도화되며 출판이 사업이 되었습니다. 인쇄와 제지 비용이 내려가면서 책이 쏟아졌고, 무엇보다 순회 도서관(circulating library)이 등장했습니다. 연회비를 내면 소설을 빌려 볼 수 있는 이 사업 모델은 18세기 중반부터 영국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소설 한 권 값이 노동자 주급에 육박하던 시절에, 대여는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발명이었죠. 여기에 상업으로 여유가 생긴 중간 계층, 특히 낮 동안 집 안에 시간이 있던 여성들이 독자층으로 들어옵니다. 시장이 먼저 만들어지고 장르가 그 위에서 자랐습니다.
무인도에 혼자 남은 개인
1719년 대니얼 디포가 내놓은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는 이 시대의 정신을 통째로 보여 줍니다. 난파해 무인도에 떨어진 한 남자가 날짜를 세고, 물품 목록을 적고, 울타리를 세우고, 손익을 계산하듯 자기 처지를 장부로 정리합니다. 초자연적 도움도, 왕의 명령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개인의 노동과 계산과 신앙이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문학사가 이언 와트는 1957년 『소설의 발생』(The Rise of the Novel)에서 이런 특징을 형식적 리얼리즘(formal realism)이라 부르며,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와 개인의 경험을 중심에 놓는 서술 방식이 근대 소설을 정의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 작품을 읽는 눈은 갈립니다. 개인주의와 자립의 찬가로 보는 독법이 오래 우세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프라이데이와의 관계를 근거로 제국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서사로 다시 읽는 비평이 강해졌습니다.
편지로 쓴 소설, 그리고 그것을 놀린 소설
1740년 새뮤얼 리처드슨은 『파멜라』(Pamela; or, Virtue Rewarded)를 내놓습니다. 하녀가 주인의 구애와 압박 속에서 겪는 일을 본인이 쓴 편지로만 보여 주는 서간체 소설(epistolary novel)이었습니다. 효과는 강력했습니다. 사건이 끝난 뒤 정리된 회고가 아니라, 결말을 모르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공포와 계산이 그대로 전달되니까요. 근대 소설의 핵심 자산인 내면 묘사가 여기서 본격화됩니다. 그런데 곧바로 반격이 왔습니다. 1741년 가명으로 나온 패러디 『샤멜라』(Shamela)는 이 여자가 실은 계산속으로 정조를 파는 것 아니냐고 비꼬았는데, 오늘날에는 헨리 필딩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필딩은 이어 『조지프 앤드루스』(1742)와 『톰 존스』(1749)에서 여러 인물을 내려다보며 논평하는 전지적 화자를 세웠습니다. 리처드슨의 내면과 필딩의 조감, 지금도 소설이 쓰는 두 카메라가 이때 갈라졌습니다.
첫걸음부터 형식을 부순 사람
여기서 로렌스 스턴이 나타납니다. 1759년부터 연재된 『트리스트럼 섄디』(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eman)는 주인공이 자기 인생을 쓰겠다며 시작해 놓고, 태어나기까지 몇 권을 소모합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고, 서문이 뒤에 나오고, 한 인물의 죽음 앞에서 지면 전체를 새까맣게 칠한 페이지가 등장하며, 독자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장르가 자리 잡기도 전에 이미 그 형식을 해체한 셈입니다. 소설이 처음부터 규칙을 세우며 자란 것이 아니라, 규칙과 파괴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증거죠.
저급 오락이라는 낙인, 그리고 여성들
그런데 당대에 이 모든 것은 고급 문학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뜻하는 novel은 원래 새로 나온 자잘한 이야깃거리라는 뉘앙스를 지녔고, 비평가들은 젊은 여성이 소설을 읽으면 헛된 기대와 방종에 빠진다고 걱정했습니다. 새뮤얼 존슨조차 1750년 『램블러』 4호에서 새 유형의 소설이 젊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낙인이 찍힌 자리에서 여성 작가들이 시장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애프라 벤은 1670년대부터 극작가로 활동하며 글로 생계를 꾸린 최초의 영국 여성으로 꼽히고 1688년 『오루노코』(Oroonoko)를 남겼습니다. 프랜시스 버니의 『에벌리나』(Evelina, 1778)는 사교계에 처음 나온 여성의 시선을 소설의 중심에 세웠고, 앤 래드클리프의 『우돌포의 비밀』(The Mysteries of Udolpho, 1794)은 고딕 소설을 최대 흥행 장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18세기 중국에서는 조설근이 『홍루몽』(紅樓夢)을 쓰고 있었습니다. 소설의 성장이 영국만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시장 위에서 서술 기법 자체를 바꿔 버린 작가들을 만나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새로 등장한 오락 매체가 "젊은 사람을 망친다"는 비난을 받다가 나중에 예술로 승격되는 일은 소설, 영화, 만화, 게임에서 반복됐습니다. 이 승격은 작품이 좋아져서 일어나는 걸까요, 아니면 그 매체로 자란 세대가 평가하는 자리에 앉게 되어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