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2강. 제국의 언어로 제국에 답하기
총과 지도로 시작된 지배는 교실과 소설에서 완성됐습니다. 그래서 반격도 거기서 시작됩니다.
풀고 시작
조이스 케리에게 보낸 답장
1950년대 나이지리아 이바단의 대학생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는 수업에서 조이스 케리의 소설 『미스터 존슨』을 읽다가 불쾌해집니다. 영국인이 쓴 그 책 속 아프리카인은 우스꽝스럽고 얄팍했습니다. 그는 훗날 그때 자기 쪽 이야기는 자기가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58년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입니다.
이 소설은 선교사와 식민 행정이 도착하기 전의 이보(Igbo) 마을을 먼저 충분히 보여줍니다. 속담과 재판과 신들과 세대 갈등이 이미 갖춰진 사회죠. 주인공 오콩코는 강한 사람이지만 아버지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하다 자신을 망치는 인물이고, 결코 순결한 원주민이 아닙니다. 아체베가 뒤집은 것은 사건의 승패가 아니라 누가 관찰당하는 자리에 놓이는가였습니다. 제목은 예이츠의 시 「재림」에서 왔습니다. 영국 문학의 구절을 빌려 영국이 만든 아프리카 이미지에 답장을 쓴 셈이죠. 아체베는 1975년 강연에서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이 아프리카를 유럽인의 심리 배경으로 소모한 인종주의적 작품이라 비판해 또 한 번 논쟁을 일으켰고, 이 비판이 지나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이어졌습니다.
영어를 버릴까, 영어를 고쳐 쓸까
케냐의 응구기 와 티옹오(Ngũgĩ wa Thiong'o)는 아체베와 정반대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기쿠유어를 쓰다 걸린 아이가 벌로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식민 지배는 총이 아니라 그 교실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1977년 기쿠유어 희곡을 농민들과 함께 올린 뒤 그는 재판 없이 구금되고, 감방에서 화장지에 기쿠유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1986년 『정신의 탈식민지화』(Decolonising the Mind)에서 앞으로 소설을 영어로 쓰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세계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어로 쓰는 순간 독자는 자기 마을이 아니라 런던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죠.
아체베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영어는 역사가 자신에게 떠넘긴 조건이고, 자신은 그것을 아프리카의 경험을 견딜 수 있는 영어로 고쳐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문장에는 이보 속담의 리듬이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응구기 쪽은 소수 언어 문학의 생존을, 아체베 쪽은 도달 범위를 얻습니다. 둘 다 대가를 치릅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연장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논쟁의 판을 바꿉니다. 그의 주장은 동양에 관한 서양의 학문과 문학과 여행기가 실재하는 동양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동양이라는 대상 자체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앎은 힘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지배할 대상을 먼저 설명 가능한 것으로 정리해 두어야 지배가 가능해지니까요.
이 관점은 문학 독자에게 구체적인 연장을 하나 쥐여 줍니다.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1993)에서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를 다시 읽습니다. 영국 시골 저택의 안락한 질서는 카리브해 안티과의 농장 수입에 얹혀 있는데, 소설은 그것을 몇 줄로 지나칩니다. 배경에 밀려난 것을 함께 읽는 이 방식을 그는 대위법적 읽기라 불렀습니다. 진 리스(Jean Rhys)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는 아예 소설로 그 일을 합니다. 『제인 에어』의 다락방에 갇힌 여자에게 카리브해의 유년과 이름을 돌려주죠. 사이드에게는 서양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렸다는 비판이 따라붙었지만, 그가 만든 독법은 남았습니다. 그 독법을 이어받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 Spivak)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대신 말해 주겠다는 지식인의 선의조차 정작 그 목소리를 다시 지울 수 있다는 물음이죠.
번역된 인간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 1981)은 인도가 독립하는 자정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국가의 역사와 개인의 몸이 뒤엉키고, 화자는 자기 기억이 틀렸을 수 있다고 계속 실토합니다. 루슈디는 에세이 「상상의 고향」에서 이주자를 번역된 인간이라 부릅니다. 흔히 번역에서 무언가 잃는다고 하지만 얻는 것도 있다는 것이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자리가 오히려 두 세계를 동시에 보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 자리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악마의 시』 이후 그에게 내려진 파트와로 그는 여러 해를 은신하며 살아야 했고,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신성모독을 둘러싼 국제적 분쟁이 됐습니다. 이주자 문학이 낭만적 혼종성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세월이 보여 줍니다.
세계문학이라는 진열대
괴테는 1827년에 이미 세계문학(Weltliteratur)의 시대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열대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파스칼 카자노바(Pascale Casanova)는 문학에도 중심과 주변이 있다고 보고, 파리를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에 빗댔습니다. 번역되어야 세계문학이 되는데, 무엇을 번역할지는 중심의 출판 시장이 정합니다. 영어권 출판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랫동안 몇 퍼센트 수준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반복되는 이유죠.
칭찬의 방식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비서구 작품이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그렸다고 상찬받는 순간, 그 작품이 붙들고 있던 구체적인 역사가 조용히 지워지기도 합니다. 이 진열대 문제는 4강에서 문학상과 번역가를 다룰 때 다시 정면으로 나옵니다. 그 전에 3강에서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흐름을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내가 지금 읽는 번역 소설들의 목록은 누가 골라 준 것일까요. 그 목록에 들어오지 못한 언어의 문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