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4강.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발명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독일 미술비평에서 건너온 수입품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장편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연 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장편소설을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존재하지 않는 책의 서평을 썼죠. 방대한 소설을 쓰는 대신 그 소설이 이미 있다고 치고 요약하고 논평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그의 농담 섞인 변명이었습니다.
『픽션들』(Ficciones, 1944)에 실린 단편들은 그래서 아이디어의 밀도가 무섭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은 가능한 모든 문자 조합이 다 꽂혀 있는 무한한 도서관을 상상하는데, 모든 진리가 거기 있지만 동시에 모든 거짓도 있어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돈키호테의 몇 개 장을 원문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20세기에 다시 써낸 작가를 다루면서, 같은 문장도 누가 언제 썼느냐에 따라 다른 텍스트가 된다는 주장을 던집니다. 미로와 거울과 무한이라는 그의 장치들은 이후 포스트모던 소설과 이론이 두고두고 빌려 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얼음을 보러 갔던 오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2014)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1967)은 첫 문장부터 시간을 접습니다. 여러 해 뒤 총살대 앞에 선 대령이 아버지와 함께 얼음을 보러 갔던 먼 오후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문장이죠. 한 문장 안에 미래와 과거가 함께 들어 있고, 소설 전체는 마콘도라는 마을에 사는 부엔디아 가문의 여러 세대를 따라갑니다.
이 소설에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고 죽은 자가 돌아와 앉아 있어도 화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비가 몇 년째 내린다는 말과 오늘 장이 섰다는 말이 같은 어조로 놓이죠. 마르케스는 이 태도를 할머니에게서 배웠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가장 기괴한 이야기를 조금도 놀라지 않는 얼굴로 하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령을 찾는 데 오래 걸렸지만 결국 놀라지 않는 목소리가 기법의 전부였다는 이야기죠. 결말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몇 쪽이 이 소설의 구조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경이는 대륙에 이미 있었습니다
용어의 역사를 조금 더 따라가 보죠. 1925년 독일 비평가 프란츠 로(Franz Roh)가 표현주의 이후의 회화를 두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렀고, 이 글이 스페인어권 잡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말이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문학 쪽에서 결정적인 발언은 쿠바의 알레호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가 했습니다. 그는 1949년 『이 세상의 왕국』 서문에서 경이로운 현실(lo real maravilloso)이라는 개념을 내놓으며, 유럽 초현실주의자들이 기법으로 짜내는 경이를 아메리카에서는 역사와 지리가 이미 제공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이티 혁명의 실제 사건들이 어떤 초현실주의 작품보다 기이하다는 것이었죠.
여기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표를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본격적으로 붙인 것은 1950년대 이후의 비평이었습니다. 그러니 순서는 이렇습니다. 작품이 먼저 있었고, 이름은 나중에 밖에서 왔습니다.
대륙을 납작하게 만드는 이름표
이름표가 붙자 부작용이 따라왔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소설이라면 응당 정글과 미신과 하늘을 나는 여자가 나와야 한다는 기대가 생긴 것이죠. 국제 출판 시장이 그 기대에 맞는 작품만 골라 번역하면서, 도시와 관료제와 중산층을 다루는 소설은 덜 팔리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반발은 안에서 나왔습니다. 1996년 칠레의 알베르토 푸겟과 세르히오 고메스는 선집 『맥콘도』(McOndo)를 내며 이름부터 비꼽니다. 마콘도에 맥도날드와 매킨토시와 콘도를 겹쳐 놓은 말장난이죠. 자기들 동네에는 패스트푸드점과 케이블 텔레비전과 대도시의 소음이 있지 하늘을 나는 처녀는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로베르토 볼라뇨 역시 이 상표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정전의 편중도 함께 지적됩니다. 붐 세대는 압도적으로 남성 중심이었고, 브라질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나 멕시코의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스,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같은 이름은 오래 뒤로 밀려 있었습니다. 리스펙토르가 영어권에서 본격 재조명된 것은 21세기 들어서였고, 지금은 사만타 슈웨블린이나 페르난다 멜초르처럼 붐의 문법과 다른 자리에서 폭력과 불안을 정면으로 쓰는 작가들이 대륙의 얼굴을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번역이 만든 세계문학
붐(Boom)은 작품만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에 코르타사르의 『팔방치기』(1963), 바르가스 요사의 초기 장편, 푸엔테스의 소설들이 잇달아 나왔고, 이들을 묶어 세계 시장에 올린 것은 출판과 번역의 힘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에이전트 카르멘 발셀스는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계약 조건을 바꿔 놓았고, 그레고리 라바사의 영역본은 마르케스가 원작보다 낫다고 했다는 말이 따라다닐 만큼 평판이 높았습니다.
정치도 얽혀 있었습니다. 쿠바 혁명은 이 세대를 한동안 하나로 묶었다가 1971년 시인 파디야의 구금 사건을 계기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붐은 문학 운동이자 출판 현상이자 냉전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다음 강에서는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문학이 어떻게 다시 입을 열었는지를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어떤 지역의 문학에 이름표가 붙으면 세계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만 동시에 그 문의 크기가 정해집니다. 한국 문학에 지금 붙어 있는 이름표는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