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1강. 생명의 정의라는 난제
생물학은 자기 연구 대상을 아직 한 문장으로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가 이 학문의 출발점입니다.
풀고 시작
특징 목록이라는 우회로
생물학 교과서를 펼치면 이상한 점이 하나 보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는 없고, 그 자리에 특징 목록이 들어 있습니다. 정의에 실패했다는 고백을 목록으로 대신한 셈이죠. 목록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대사(metabolism)는 외부에서 물질과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유지하는 활동입니다. 복제(reproduction)는 자신과 닮은 개체를 만드는 능력이고, 항상성(homeostasis)은 환경이 변해도 내부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조절입니다. 진화(evolution)는 세대를 거치며 변이가 선택되어 집단이 변해 가는 과정이죠. 여기에 성장, 자극에 대한 반응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목록,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줄줄이 무너집니다. 촛불은 산소와 연료를 소비하며 스스로를 유지하고 번지기까지 하지만 살아 있지 않습니다. 소금 결정은 성장하고 같은 구조를 반복해 만들죠. 냉장고의 온도 조절 장치는 항상성을 훌륭하게 구현합니다. 반대 방향의 반례도 있습니다. 노새는 불임이라 복제하지 못하지만, 누구도 노새가 죽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특징 목록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에 실패한 자리에 세운 임시 구조물인 셈입니다.
바이러스라는 경계 사례
이 난제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DNA 또는 RNA)을 갖고, 변이하며,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분명 생명체 같죠. 그런데 세포 구조가 없고 스스로 대사를 하지 못합니다. 숙주 세포 밖에서는 단백질 껍질에 싸인 화학 물질 덩어리처럼 행동하다가, 숙주 안에 들어가야만 복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이러스를 "살아 있다"고 볼지에 대해 학계의 견해가 갈립니다. 2003년 발견된 미미바이러스(mimivirus)처럼 일부 세균보다 큰 유전체를 가진 거대 바이러스가 보고되면서 경계는 더 흐려졌죠. 바이러스 논쟁이 알려 주는 것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자연이 그어 둔 선명한 선이 애초에 없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NASA의 실용적 정의
철학적 논쟁은 미룰 수 있어도, 우주선을 띄우는 사람들은 정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화성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살아 있는지" 판정할 기준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NASA(미국 항공우주국)의 외계생물학 프로그램은 1990년대부터 실무용 정의를 채택했습니다. "생명은 다윈적 진화를 할 수 있는 자기 유지적 화학 시스템이다." 이 정의는 개별 특징 대신 시스템의 능력에 주목합니다. 대사와 항상성은 "자기 유지"에, 복제와 변이와 선택은 "다윈적 진화"에 압축되어 있죠. 물론 이것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진화는 개체가 아니라 집단의 성질이므로, 외계에서 단 하나의 개체를 발견하면 이 정의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래도 탐사 장비를 설계할 때 무엇을 측정할지 정해 준다는 점에서 실용적 가치가 큽니다.
슈뢰딩거의 작은 책
1944년,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자기 전공도 아닌 생물학에 대해 책을 냈습니다.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더블린 강연을 묶어 출간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는 두 가지 통찰을 남겼습니다. 첫째, 유전 정보는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에 담겨 있으리라는 예측입니다. 반복 구조만으로는 정보를 담을 수 없으니, 규칙적이되 단조롭지 않은 분자가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었죠. 둘째, 생명은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는 표현으로, 생물이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질서를 흡수해 자신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의 진짜 위력은 독자 명단에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진로를 튼 젊은이들 중에 왓슨(James Watson)과 크릭(Francis Crick)이 있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슈뢰딩거의 예측에 실체를 부여했습니다. 이 서가의 다음 강들에서 그 화학적 기초와 기원 문제를 차례로 다룹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스스로 수리하고 복제하며 환경에 적응하는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을 살아 있다고 불러야 할까요.
- 정의가 없어도 생물학은 잘 작동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애초에 왜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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