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4강. 지도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화가 거리를 지웠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배 한 척이 운하를 막자 지구 반대편 공장이 멈췄습니다.
풀고 시작
지도가 다시 펼쳐진 이유
한동안 지리는 한물간 변수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본과 정보가 국경을 넘나들고 공급망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대에, 산맥과 해협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죠. 그런데 팬데믹과 물류 대란, 에너지 가격 급등, 반도체 부족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다시 지도를 꺼냈습니다. 상품이 어디서 만들어져 어느 바다를 지나 오는지가 갑자기 안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지정학은 지도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지도가 선택의 비용을 다르게 매긴다는 주장입니다. 같은 목표라도 바다를 낀 나라와 내륙에 갇힌 나라는 지불해야 할 값이 다릅니다. 이 차이가 국가의 전략에 오래 남는 습관을 만듭니다.
심장지대와 주변지대
영국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는 1904년 강연에서 세계사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대결로 다시 읽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저작에서 유명한 3단 명제를 내놓았죠.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대(Heartland)를 지배하고,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섬(World Island)을 지배하며, 세계섬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편에는 해양력 학파가 있었습니다. 앨프리드 머핸은 1890년 저작에서 제해권과 해상 교역로의 통제가 국가의 부와 힘을 결정한다고 논증했습니다. 두 갈래를 절충한 사람이 네덜란드 출신 미국 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입니다. 그는 1944년 저작에서 진짜 승부처는 내륙의 심장지대가 아니라 그 바깥을 감싼 연안 지대, 곧 주변지대(Rimland)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구와 산업과 항구가 모여 있는 곳이 거기이고, 역사의 큰 전쟁도 대개 그 띠에서 벌어졌다는 것이죠.
| 학파 | 결정적 공간 | 처방의 방향 |
|---|---|---|
| 매킨더 | 유라시아 내륙 심장지대 | 내륙 세력의 팽창을 동유럽에서 차단합니다 |
| 머핸 | 대양과 해상 교역로 | 함대와 기지로 항로를 확보합니다 |
| 스파이크먼 | 유라시아 연안 주변지대 | 연안 지역이 한 세력에 통합되지 않게 관리합니다 |
지리는 운명이 아닙니다
이 이론들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첫째, 기술이 지도의 의미를 계속 바꿉니다. 매킨더가 철도를 보고 판을 다시 짰듯, 항공기와 장거리 미사일은 지형의 방벽 효과를 크게 줄였고 사이버 공간은 거리를 아예 다르게 정의합니다. 둘째, 지리는 상수인데 국가의 행동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나라가 어느 시기에는 팽창하고 어느 시기에는 고립을 택하죠. 상수로 변수를 설명하면 설명력이 헐거워집니다.
셋째로 정치적 오용의 역사가 있습니다. 20세기 전반 독일에서 지정학은 팽창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쓰였고, 그 탓에 전후 한동안 이 분야 자체가 학문적으로 기피되었습니다. 지리적 조건에서 곧바로 특정 국가의 행동이 필연이라고 읽어 내는 순간, 설명은 변명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지정학은 결론이 아니라 제약 조건의 목록으로 쓸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좁은 목이 세계를 쥡니다
오늘날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넓은 대륙이 아니라 좁은 목입니다. 세계 원유의 상당량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고, 동아시아로 향하는 에너지와 화물의 큰 몫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는 수에즈 운하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걸려 있습니다. 이런 병목을 초크포인트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작은 사고나 작은 봉쇄가 전 세계 가격에 즉시 반영됩니다.
물자만이 아닙니다. 첨단 반도체는 설계와 제조와 장비가 각각 소수의 지역과 기업에 몰려 있고, 극자외선 노광장비처럼 사실상 한 회사만 만드는 품목도 있습니다. 배터리와 태양광의 정제 공정, 일부 희토류 가공도 지리적 집중도가 높습니다. 헨리 패럴과 에이브러햄 뉴먼은 2019년 연구에서 이런 구조를 무기화된 상호의존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얽혀 있으면 싸우지 않게 된다는 기대와 달리, 네트워크의 길목을 쥔 쪽이 그 얽힘 자체를 압박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죠.
전이인가 얽힘인가
강대국 경쟁을 보는 틀도 갈립니다. 오르갠스키가 1958년에 제시한 세력 전이론은 도전국의 국력이 기존 주도국에 근접하는 구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레이엄 앨리슨은 2017년 저작에서 이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 부르며 역사 사례를 모아 전쟁으로 끝난 비율이 높았다고 정리했습니다. 다만 어떤 사례를 목록에 넣고 무엇을 전이로 볼지에 따라 비율이 크게 달라진다는 비판이 함께 따라붙습니다. 확률처럼 보이는 숫자가 사실은 사례 선정의 결과일 수 있다는 지적이죠.
반대편의 상호의존론은 무역과 투자와 인적 교류가 깊을수록 충돌의 비용이 커져 억제가 작동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반박은 앞 절에서 본 그대로입니다. 얽힘은 비용을 만들지만 동시에 지렛대도 만듭니다. 결국 지도는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의 목록을 줍니다. 어디가 병목인지, 대체 경로가 있는지, 그 경로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리는지 말이죠. 이것으로 국제정치 과목을 마치고, 다음 과목에서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 법이라는 규칙 체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병목을 쥐면 힘이 생기지만, 그 힘을 한 번 쓰는 순간 상대는 대체 경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지렛대는 쓰지 않을 때 가장 강하다는 말이 맞다면, 그것을 언제 쓸지 판단할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