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의 기초 1강. 권력: 시키지 않고도 따르게 하는 힘
가장 강한 권력은 명령이 필요 없는 권력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권력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죠.
풀고 시작
권력은 물건이 아니라 확률입니다
막스 베버(1864~1920)는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저항을 무릅쓰고라도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개연성이라고 말이죠. 여기서 눈여겨볼 단어는 개연성입니다. 권력은 금고에 넣어 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가 만들어 내는 확률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도 아무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반대로 직함이 없어도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본다면 그는 이미 권력을 가진 것이죠.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1957년 논문에서 이 발상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다듬었습니다. A가 B로 하여금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만든다면 A는 B에 대해 권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깔끔하죠. 그런데 이 깔끔함이 곧 반세기짜리 논쟁의 불씨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충돌에서 누가 이겼는지만 세면 권력의 전부를 셀 수 있을까요.
권력에는 얼굴이 세 개 있습니다
달은 미국의 한 도시에서 누가 실제로 결정을 이기는지 사안별로 추적했고, 승자가 매번 달라진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권력이 한 집단에 뭉쳐 있지 않고 흩어져 있다는 다원주의의 근거였죠. 반박은 곧 왔습니다. 바크라크와 바라츠는 1962년 논문에서 권력의 두 번째 얼굴을 지적합니다. 진짜 승부는 표결에서가 아니라 무엇이 안건이 되느냐에서 이미 끝나 있다는 것입니다. 논의조차 되지 않은 문제는 회의록에 남지 않으니, 회의록을 세는 연구자는 그 권력을 영원히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의제 설정이고, 두 사람은 뒤이은 작업에서 이를 무의사결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스티븐 루크스는 1974년에 세 번째 얼굴을 덧붙입니다. 가장 값싼 권력은 사람들이 애초에 다른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권력이라는 것이죠. 불만이 없으니 갈등도 없고 갈등이 없으니 관찰될 것도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배가 폭력이 아니라 상식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답이 돌아오죠.
다만 이 차원에는 만만찮은 반론이 따라붙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고 진짜 이익은 따로 있다고 판정하려면, 그 판정을 누가 무슨 자격으로 하느냐는 문제가 남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의 진술을 넘어서는 순간 연구자가 대신 판정하는 구도가 되고, 그것이 또 하나의 권력이 아니냐는 되물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세 얼굴 이론은 확정된 정답이라기보다, 권력을 어디까지 보아야 하는가를 두고 지금도 이어지는 논쟁의 지도에 가깝습니다.
총을 든 사람보다 무서운 것은 따르고 싶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강제와 권위는 다릅니다. 강제는 총구를 들이대는 것이고, 권위는 상대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상태입니다. 차이는 비용에서 드러납니다. 강제로만 굴러가는 질서는 감시자를 두어야 하고 그 감시자를 감시할 사람을 또 두어야 합니다. 반면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명령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지켜집니다. 통치자가 정당성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베버는 정당한 지배의 원천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늘 그래 왔다는 이유로 따르는 전통적 지배, 지도자의 비범함에 이끌려 따르는 카리스마적 지배, 정해진 규칙에 따라 그 자리에 올랐으니 따르는 합법적 지배입니다. 이 셋은 차례로 발전하는 단계가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섞여 있는 이념형입니다. 카리스마는 폭발적이지만 사람에게 붙어 있어서 그가 사라지면 함께 무너집니다. 그래서 카리스마로 시작한 운동은 살아남으려면 규칙과 조직으로 굳어져야 하고, 베버는 이를 카리스마의 일상화라고 불렀습니다.
권력이 가장 잘 숨는 자리
보이지 않는 권력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류의 기본 선택지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회의 안건의 순서를 누가 정하는가, 성과를 어떤 지표로 재는가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대부분이 같은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지를 그렇게 배치한 사람이 결정을 대신한 셈이죠. 어떤 문제를 공적 사안이라 부르고 어떤 문제를 개인의 사정이라 부를지 가르는 언어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다만 이 관점을 끝없이 밀면 세상 모든 일이 권력이 되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권력 연구의 실제 쟁점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권력으로 셀 것이며 그것을 어떤 증거로 확인할 것이냐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권력이 가장 크고 단단하게 뭉친 형태, 곧 국가로 넘어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내가 지금 원한다고 믿는 것들 가운데, 만약 다른 정보와 다른 선택지 배치 아래 자랐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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