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작동 3강.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국회 본회의장의 표결 장면은 입법의 마지막 5분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카메라가 잘 가지 않는 방에서 흘러갑니다.
풀고 시작
법안 하나가 지나야 하는 관문들
헌법이 정한 법률안 제출 주체는 국회의원과 정부 둘입니다. 여기에 국회법은 상임위원회가 소관 사항에 관해 법률안을 직접 제출할 수 있게 해 두었고, 비슷한 법안 여럿을 하나로 묶은 위원장 대안이 이 경로로 나옵니다. 의원이 낼 때는 일정 수 이상 동료 의원의 찬성이 필요하고, 정부가 낼 때는 부처 협의와 입법예고,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의결이라는 긴 사전 절차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부 제출 법안은 수는 적어도 다듬어진 상태로 도착하는 경우가 많죠.
발의된 법안은 곧장 본회의로 가지 않습니다.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되어 상정, 제안 설명, 전문위원 검토보고, 대체토론을 거친 뒤 소위원회로 넘어갑니다. 조문 한 줄을 놓고 며칠씩 다투는 곳이 바로 이 소위입니다. 위원회 의결을 통과하면 법제사법위원회가 다른 법률과 충돌하지 않는지, 문장이 법률의 형식에 맞는지 체계와 자구를 심사합니다. 그다음이 본회의 표결이고, 통과된 법률은 정부로 이송되어 공포됩니다. 대통령은 이의가 있으면 기한 안에 국회로 돌려보내 다시 논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강의는 제도의 얼개를 설명하는 일반 상식 수준이며, 구체적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진짜 무대는 위원회입니다
정치학자 넬슨 폴스비는 의회를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법안을 실제로 뜯어고치는 변환적 의회와, 이미 정해진 안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이는 무대형 의회입니다. 미국 의회가 앞쪽의 전형이고 영국 하원이 뒤쪽에 가깝습니다. 위원회가 강할수록 의회는 행정부가 짜 온 안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기구에서 멀어집니다. 한국 국회도 위원회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구조에는 비용이 따릅니다. 위원회에 회부된 법안이 상정조차 되지 않으면 논의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한국 국회는 회기가 바뀌어도 법안이 폐기되지 않는 회기계속의 원칙을 취하지만, 의원 임기가 만료되면 그때까지 처리하지 못한 법안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발의 건수는 해마다 늘지만 원안대로 통과되는 비율은 그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래서 각국 의회는 특정 안건의 심사 기한을 정해 강제로 다음 단계로 넘기는 장치나, 소수파가 표결을 지연시킬 수 있는 장치를 함께 두고 균형을 잡으려 합니다. 어느 쪽 장치를 강화할지는 다수의 통치 능력과 소수의 발언권 중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에 달린 선택이죠.
뼈대만 남은 법률, 살을 붙이는 행정부
법률을 직접 읽어 보면 자주 만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구절입니다. 현대 사회의 규율 대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해서 국회가 모든 것을 조문에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회는 기준과 한계를 정하고 구체적 내용은 행정부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맡깁니다. 이것이 위임입법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국민 생활을 실제로 좌우하는 기준선이 국회를 거치지 않은 문서에서 정해지는 일이 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법은 법률이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해 위임하도록 요구하며, 무엇을 위임하는지 알 수 없는 백지 위임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이 기준을 벗어난 하위 법령을 무효로 판단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위임의 총량이 계속 늘어나는 흐름은 여러 민주주의 국가가 공유하는 현상이고, 이를 행정국가화라고 부릅니다.
집행하는 손이 정책을 다시 씁니다
법이 만들어졌다고 정책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이클 립스키는 1980년에 흥미로운 관찰을 내놓았습니다. 창구 공무원, 경찰관, 교사처럼 시민을 직접 만나는 일선 공무원은 늘 자원과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재량을 행사하는데, 그 재량의 총합이 사실상 정책의 실제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법이라도 어느 창구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시민이 겪는 현실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좋은 법을 만드는 일과 그 법이 현장에서 원래 의도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은 별개의 과제입니다.
견제 장치와 그 한계
의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자 행정부를 감시하는 곳입니다.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로 집행 실태를 따지고,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심의해 확정하며, 결산으로 지출을 사후 점검합니다. 인사청문회로 주요 공직 후보자를 검증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장치들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정보가 행정부 쪽에 압도적으로 몰려 있어서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감사가 짧은 기간에 몰리면 깊이 있는 추적보다 화제성 질의가 늘어나기 쉽고, 방대한 예산을 제한된 시간에 심사하다 보면 총액의 극히 일부만 실질적으로 다뤄집니다. 한국 헌법은 국회가 정부 동의 없이 지출 항목을 늘리거나 새 항목을 만들 수 없도록 정하고 있어서, 의회의 예산 권한은 깎는 방향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가 의회 소속 예산 분석 기구나 상설 조사 인력을 키워 정보 격차를 줄이려 합니다. 견제는 권한의 문제이기 이전에 정보와 인력의 문제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의회가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정하면 사회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행정부에 넓게 위임하면 선출되지 않은 손이 규칙을 쓰게 됩니다. 이 둘 사이의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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