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1강. 자유주의: 개인이 먼저다
자유주의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답하기를 포기한 대신, 그 질문에 각자 다르게 답할 권리를 지키기로 한 사상입니다.
풀고 시작
권력에게 설명을 요구한 이상한 발상
17세기 유럽에서 권력은 설명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왕은 신에게서 왔으므로 왜 다스리냐는 질문 자체가 불경이었죠. 로크가 뒤집은 것이 바로 이 방향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생명과 자유와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미 가진 채로 사회에 들어온다고 보고, 정부를 그 권리를 맡아 관리하는 수탁자로 재정의했습니다. 관리인이 계약을 어기면 해임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정당화의 부담이 통치받는 쪽에서 통치하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 법치가 붙습니다. 통치자도 법 아래 있고, 법은 미리 공표되어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권한은 열거된 범위 안에 갇힙니다. 흥미로운 것은 밀이 1859년 『자유론』에서 걱정한 상대가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여론이었습니다. 다수가 소수의 삶의 방식을 촌스럽다고 짓누르는 사회적 압력을 그는 다수의 폭정이라 불렀고, 국가든 사회든 개인에게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행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칠 때뿐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자유의 두 얼굴
1958년 옥스퍼드 취임 강연에서 벌린은 자유라는 한 단어가 사실은 두 질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나를 가로막는 사람이 없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가입니다. 이것이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 곧 간섭의 부재입니다. 둘째는 내 삶을 실제로 이끄는 주인이 누구인가입니다. 이것이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 곧 자기지배입니다.
벌린이 던진 경고는 두 번째 쪽을 향합니다. 진정한 자아라는 개념이 들어오는 순간,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은 진짜 네 뜻이 아니라고 판정할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강제가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됩니다. 물론 반대 방향의 반론도 강력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걸어 나갈 힘이 없는 사람에게 간섭의 부재는 공허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교육과 최소한의 소득이 자유의 조건인가 아니면 자유와 구분되는 별개의 가치인가, 이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롤스와 노직,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결론
1971년 롤스의 『정의론』은 사고실험 하나로 판을 바꿉니다. 자신이 어떤 재능과 계급과 성별로 태어날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사회 규칙을 고르라면 무엇을 고르겠느냐는 물음입니다. 롤스의 답은 두 가지였습니다. 기본적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하되 그것을 다른 이익과 맞바꾸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불평등은 가장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의 몫을 키울 때에 한해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권리에서 출발했는데 재분배하는 복지국가가 결론으로 나온 셈입니다.
1974년 노직의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는 같은 출발점에서 정반대로 갑니다. 그의 초점은 결과의 모양이 아니라 이력입니다. 처음 취득이 정당했고 이후 이전이 자발적이었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분배는 아무리 불평등해 보여도 정당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재분배를 위한 과세는 타인의 노동 시간에 대한 권리 주장이 됩니다. 그가 남긴 국가는 폭력과 절도를 막는 최소국가뿐입니다. 이 분기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말이 나라마다 다르게 들립니다. 미국에서 리버럴은 대개 재분배를 지지하는 쪽을 가리키지만, 유럽에서 같은 단어는 시장의 자유를 앞세우는 쪽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주의를 향한 반론들
1980년대에 공동체주의자들이 반격에 나섭니다. 매킨타이어와 샌델, 테일러의 논지는 자유주의가 전제한 인간상 자체를 겨냥합니다. 아무 소속도 없이 자기 목적을 자유롭게 고르는 자아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특정한 언어와 가족과 전통 속에서 비로소 무엇을 원할지를 배운다는 것이죠. 국가의 중립이라는 이상도 의심받습니다. 중립을 선언한 제도 역시 특정한 삶의 방식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다는 지적입니다.
비판이론과 마르크스주의 계열은 다른 층을 팝니다. 계약의 자유는 협상력이 대등할 때만 자유이고, 형식적 권리의 평등이 실질적 처지의 격차를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즘 정치이론은 공과 사를 나누는 자유주의의 구획선이 가정 안의 권력 관계를 사적 영역으로 밀어내 정치의 시야 밖에 두었다고 비판합니다.
자유주의 쪽 재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의 가치를 이어받을지 판단하는 자리에는 결국 개인이 서 있다는 것, 그리고 신념이 근본적으로 갈라진 사회에서 함께 살 절차를 찾는 일이 애초의 과제였다는 것입니다. 롤스 자신도 1993년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방향을 조정합니다. 자유주의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관으로 내세우는 대신,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시민들이 정치의 영역에서만 겹쳐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자는 제안이었죠. 어느 쪽 손을 들어 줄지는 여러분의 몫이고, 다음 강에서는 이 개인주의적 출발점 자체를 의심하는 사상을 만나게 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간섭받지 않을 자유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가운데 어느 쪽이 부족할 때 우리는 더 자유롭지 않다고 느낄까요. 그 답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그 차이 위에 어떤 공통의 제도를 세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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