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3강. 유엔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나
유엔이 강대국을 막지 못한다는 비판은 정확합니다. 다만 유엔은 애초에 그러라고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풀고 시작
실패한 첫 실험
1920년 출범한 국제연맹은 인류가 처음 만든 상설 집단안보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설계도부터 금이 가 있었습니다. 창설을 주도한 나라가 미국이었는데도 상원이 조약 비준을 거부해 미국은 끝내 가입하지 않았고, 주요 결정에 사실상 만장일치가 필요해 한 나라만 반대해도 멈췄습니다. 무엇보다 자체 군대도 강제 집행 수단도 없었습니다.
시험은 곧 왔습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연맹은 조사단을 보내 보고서를 냈지만, 결과에 반발한 일본은 1933년 탈퇴를 통고했습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는 경제 제재를 결의했으나 정작 석유가 목록에서 빠져 효과가 크지 않았죠. 여기서 뼈아픈 교훈이 남았습니다. 강대국이 떠날 수 있는 기구는 강대국을 제재할 수 없습니다.
유엔의 설계는 실패의 복기였습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진 유엔 헌장은 그 교훈을 정면으로 반영했습니다. 총회에서는 회원국이 크기와 무관하게 한 표씩 갖지만 결의는 원칙적으로 권고입니다. 반면 회원국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강제 조치를 결정할 수 있는 곳은 안전보장이사회 하나이고, 그 문은 다섯 상임이사국의 동의 없이는 열리지 않습니다.
이 구조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강대국끼리 싸우는 사안에서 유엔이 심판 노릇을 하려 들면 강대국이 판을 떠나고, 그러면 나머지 기능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설계자들은 강대국 사이의 분쟁에서는 무력하되 그 밖의 영역에서는 계속 살아 있는 기구를 택했습니다. 1950년 총회가 채택한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처럼 안보리가 막혔을 때 총회가 논의를 이어받는 우회로도 생겼지만, 그 결과물 역시 구속력이 아니라 정치적 압력의 성격을 갖습니다.
거부권을 고치자는 오래된 숙제
거부권 구조에 대한 불만은 창설 직후부터 있었습니다.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의 구성이 1945년의 힘의 지도를 반영한다는 점,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상임 의석이 없다는 점, 분쟁 당사국이 자기 사안의 결의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주된 논점이죠.
개혁안도 여럿 나와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 인도, 브라질은 상임 의석 확대를 요구해 왔고, 이탈리아와 파키스탄, 한국 등이 참여한 다른 그룹은 상임 의석 신설 대신 비상임 의석을 늘리자고 맞서 왔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거부권을 포함한 상임 의석을 요구하는 공동 입장을 정리했죠. 그런데 개혁은 구조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헌장을 고치려면 상임이사국 전원의 비준이 필요하고, 자기 특권을 줄이는 개정에 다섯 나라가 모두 동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부권 문제의 해법 자체가 거부권의 대상입니다.
강제할 수 없는 법도 법일까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경찰도 감옥도 없는데 국제법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실제로 국제사법재판소는 당사국이 관할권을 받아들여야 재판을 열 수 있고, 판결을 집행할 자체 수단도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법학자 루이스 헨킨이 남긴 유명한 관찰처럼, 거의 모든 국가가 거의 모든 국제법 의무를 거의 언제나 지킵니다. 위반 뉴스가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드물기 때문이죠. 설명은 갈립니다. 준수가 이익이 되는 사안만 애초에 조약이 된다는 해석이 있고, 평판과 상호주의와 국내 절차가 실질적 강제력을 만든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시민 교양 수준의 개념 설명이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조용히 일하는 기구들, 그리고 두 개의 평가
안보리가 눈에 띄는 동안 다른 기구들은 조용히 작동합니다. 세계무역기구는 회원국 분쟁을 판정하는 사법 절차를 갖췄지만 2019년 말 상소기구 위원 임명이 막히면서 최종심이 사실상 멈췄습니다. 국제통화기금은 출자 지분에 따라 표를 배분하고 주요 결정에 높은 특별다수를 요구해, 지분이 큰 회원국이 사실상 거부권을 갖는 구조입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5년 개정된 국제보건규칙에 따라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지만, 각국에 조치를 강제할 수단은 없고 예산의 상당 부분이 용도가 지정된 자발적 기여에 의존합니다.
평가는 정면으로 갈립니다. 존 미어샤이머는 1994년 논문에서 제도란 강대국의 이익 계산을 반영한 거울일 뿐 독립적 힘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로버트 코헤인은 제도가 정보를 제공하고 거래비용을 낮추며 약속을 검증 가능하게 만들어, 힘이 같아도 결과를 다르게 만든다고 봤습니다. 무용론이 안보리의 마비를 증거로 들면 유용론은 우편과 항공과 감염병 감시가 매일 굴러가는 사실을 증거로 듭니다. 두 쪽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다른 영역을 보고 있을 뿐이죠. 4강에서는 이런 규범의 틀이 약해질 때 무엇이 전면에 나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강대국을 제재할 수 없는 기구와 강대국이 참여하지 않는 기구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어느 쪽이 세계에 더 나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기구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부터 정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