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기초 3강.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계약은 도장을 찍는 순간이 아니라 두 사람의 뜻이 맞는 순간에 성립합니다. 문제는 그걸 나중에 증명하는 일이죠.
풀고 시작
뜻이 맞는 순간에 계약은 태어납니다
중고 거래에서 판매자가 30만 원에 팔겠다고 올리고 구매자가 사겠다고 답하면, 그 순간 계약은 이미 성립합니다. 법은 이것을 청약과 승낙의 합치라고 부르죠. 물건을 건네거나 서면을 작성해야 성립하는 계약도 일부 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계약은 대부분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만으로 성립합니다.
그래서 계약서의 진짜 기능은 계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내용을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분쟁은 대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무슨 내용이었느냐에서 벌어지고, 재판에서는 기억이 아니라 남은 자료가 이깁니다. 문자메시지 한 줄, 이체 내역 하나가 계약서 노릇을 하는 이유죠. 예외적으로 남을 위해 빚을 떠안는 보증은 워낙 위험해서, 민법이 보증인의 서명이 담긴 서면을 요구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술자리에서 도장을 대신 찍어 주는 식의 관행이 만든 비극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입니다.
자유롭게 계약할 자유의 한계
근대 민법은 세 기둥 위에 섰습니다. 내 재산은 내가 처분하고, 계약은 당사자가 알아서 정하며, 잘못이 있어야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 중 두 번째가 계약 자유의 원칙입니다. 체결할지 말지, 누구와 할지, 어떤 내용으로 할지를 국가가 대신 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두 사람이 대등할 때만 자유입니다. 한쪽이 급하고 무지하고 궁박하다면, 형식상 자유로운 합의가 실질적으로는 일방적 수탈이 되죠. 그래서 민법은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반하는 계약을 무효로 만들고, 상대의 궁박이나 경솔, 무경험을 이용해 현저히 균형을 잃은 계약도 무효로 돌립니다. 여기에 약관을 통제하는 법률, 임차인을 보호하는 특별법, 이자의 상한을 정한 법률처럼 계약 자유를 정면으로 깎아내는 장치들이 겹겹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규정 중 상당수는 당사자가 합의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계약서에 그렇게 쓰여 있어도 무효라는 말이죠.
약속을 어긴 것과 남을 다치게 한 것
민사 책임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계약을 해 놓고 지키지 않은 채무불이행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 관계가 없는 사이에서 남에게 손해를 입힌 불법행위입니다. 배달 사고와 교통사고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불법행위가 성립하려면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해자에게 고의나 과실이 있을 것, 그 행위가 위법할 것, 실제로 손해가 발생할 것, 그리고 행위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형사와 달리 민사는 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손해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배상액은 실제로 입은 손해의 크기를 따라가고,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그만큼 깎이는 과실상계가 이루어집니다. 같은 사고가 형사 처벌과 무관하게 민사 배상 판단을 받는 일이 흔한 것도 두 절차의 목적과 증명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권리를 지웁니다
권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 행사하지 않으면 사라지는데 이것을 소멸시효라고 하죠. 일반적인 채권은 십 년, 상행위에서 생긴 채권은 오 년이 기본이고, 음식값이나 학원비처럼 짧게 정해진 것들은 훨씬 빨리 지워집니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은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삼 년, 사고가 일어난 날부터 십 년이라는 두 기한이 함께 걸립니다.
억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시간을 벌면 이득을 본다는 뜻이니까요. 그래도 이 제도가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수십 년 전 일을 두고 다투게 하면 증거는 이미 사라져 진실을 가릴 수 없고, 오래 잠자던 권리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그 사이에 형성된 생활 관계가 통째로 무너집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문장이 여기서 나옵니다.
생활에서 자주 만나는 두 장면
전세와 월세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큰 돈을 거는 계약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이 집을 넘겨받고 전입신고를 마치면 그다음 날부터 새 집주인에게도 임차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해 주고, 여기에 확정일자를 더하면 경매 절차에서 후순위 채권자보다 먼저 보증금을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순서를 며칠 늦추는 것만으로 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으니 절차의 날짜가 곧 돈입니다.
보증은 반대 방향의 이야기입니다. 보증인은 돈을 한 푼도 만지지 않은 채 남의 채무를 그대로 떠안습니다. 특히 연대보증은 주채무자에게 먼저 청구하라고 요구할 권리조차 없어서, 채권자가 곧바로 보증인에게 전액을 청구할 수 있죠. 최근 제도가 여러 차례 보증인 쪽으로 손질된 것도 그만큼 피해가 컸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 상식이며 법률 자문은 아닙니다. 계약서 한 줄, 등기부의 순위 한 칸이 결과를 통째로 바꾸는 영역이라, 실제 사건이라면 서류를 들고 변호사와 상담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힙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계약의 자유를 지키는 것과 약한 쪽을 보호하는 것이 부딪힐 때,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선을 그어야 할까요. 보호를 두껍게 할수록 그 사람과 거래하려는 상대가 줄어드는 역효과는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