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4강. 민족주의와 포퓰리즘
우리라는 말은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 안에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는지를 정하는 순간, 이미 절반의 정치가 끝나 있습니다.
풀고 시작
민족은 발견된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믿지만, 민족주의라는 사상 자체는 대체로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1983년에 겔너와 앤더슨이 나란히 내놓은 연구가 이 분야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겔너의 설명은 사회 구조에서 출발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지배층과 농민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써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낯선 사람끼리 표준화된 언어로 소통해야 돌아가고, 그러려면 국가 규모의 균질한 공교육이 필요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이 민족주의를 낳은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 냈다고 뒤집어 말했습니다. 앤더슨은 여기에 감정의 메커니즘을 더합니다. 그는 민족을 상상된 정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고 불렀습니다. 상상됐다는 말은 가짜라는 뜻이 아니라, 구성원 대다수가 서로 만난 적조차 없는데도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이미지를 품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미지를 퍼뜨린 결정적 기술이 인쇄물이었습니다. 같은 신문을 같은 아침에 읽는 수십만 명이 자신들의 동시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같은 감정이 해방도 배제도 낳습니다
민족주의의 도덕적 성적표가 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끝낸 힘의 상당 부분이 민족주의였습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주장은 제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고,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묶어 냈습니다. 또한 민족 단위의 연대감이 낯선 사람에게 세금을 내는 복지국가와 국민개병제를 떠받쳤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감정이 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합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순간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 생기고, 경계에 선 소수자는 언제든 충성심을 의심받는 위치에 놓입니다. 20세기의 여러 대규모 학살과 인종 청소가 이 논리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두 종류의 민족주의를 구분하려 했습니다. 태생과 혈통을 기준으로 삼는 종족적 민족주의와, 헌법과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원리를 기준으로 삼는 시민적 민족주의입니다. 다만 이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든 두 요소가 섞여 있고, 이 구분이 종종 우리 쪽 민족주의는 좋고 저쪽 것은 나쁘다는 자기 정당화로 쓰였다는 비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이라는 얇은 이데올로기
포퓰리즘은 일상어에서 거의 욕설처럼 쓰이지만, 정치학에서는 훨씬 좁고 건조하게 정의됩니다. 널리 쓰이는 규정은 이렇습니다. 사회를 순수한 인민과 부패한 엘리트라는 동질적이고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나누고, 정치란 인민의 의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얇은 중심 이데올로기입니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경제와 국가와 국제 질서에 대해 두꺼운 답을 갖고 있지만, 포퓰리즘에는 그런 완결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서지 못하고 다른 이념에 붙어서 작동합니다. 여기에 붙은 것이 사회주의라면 부패한 엘리트는 금융 자본과 대기업이 되고, 민족주의라면 엘리트의 자리에 국경을 관리하지 못한 기득권층과 초국적 기구가 들어섭니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 형태로, 유럽에서는 우파 형태로 두드러졌다는 것이 비교정치학의 오랜 관찰입니다. 포퓰리즘은 좌우를 가로지르는 형식이지 좌우 중 한쪽의 내용이 아닙니다.
위험과 신호, 두 개의 독법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위험하다는 진단의 핵심은 반다원주의에 있습니다. 인민이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갖는다고 전제하고 자신만이 그 의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 정치적 반대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인민의 적이 됩니다. 그러면 법원과 감사기구, 언론, 소수자 보호 장치처럼 다수의 뜻을 지연시키는 제도들이 모두 인민과 그 대표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이게 됩니다. 헌법이 다수결을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둔 이유를 부정하는 셈이죠.
그런데 다른 독법도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민주주의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인민이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약속과, 절차와 협상과 전문성으로 굴러가는 실무입니다. 두 얼굴 사이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그러니까 어느 쪽에 투표해도 정책이 비슷하고 중요한 결정이 선출되지 않은 기관에서 내려진다고 느낄수록, 대표되지 못했다는 감각이 쌓입니다. 포퓰리즘 세력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일부가 기성 정치가 다루지 않던 실제 문제를 건드린다는 실증 연구도 꾸준히 나옵니다.
그래서 정직한 결론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다원주의적 주장은 제도적으로 경계하되, 그 지지가 어디서 왔는지는 별개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지자를 무지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부패한 엘리트라는 그들의 서사를 오히려 확인해 주게 된다는 지적은 여러 연구가 공유하는 관찰입니다. 다음 과목에서는 시선을 국경 밖으로 옮겨,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서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대의제가 인민의 뜻을 그대로 옮기지 않도록 일부러 설계된 것이라면, 사람들이 대표되지 못했다고 느낄 때 그 불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제도가 그 통로를 마련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