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도구 4강. 무엇이 근거인가
효과가 있어 보이는 것과 효과가 있는 것 사이에는 무작위 배정이라는 다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풀고 시작
무작위 배정은 아직 모르는 교란까지 나눕니다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1747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James Lind)는 괴혈병에 걸린 선원 열두 명을 두 명씩 여섯 조로 나눠 서로 다른 처방을 주었고, 감귤류를 받은 조만 눈에 띄게 회복했습니다. 다만 조를 나눈 방식은 무작위가 아니었죠.
무작위 배정이 표준이 된 것은 1948년입니다. 영국 의학연구위원회가 오스틴 브래드퍼드 힐(Austin Bradford Hill)의 설계로 결핵 치료제 스트렙토마이신을 시험하면서, 환자를 봉인된 봉투로 무작위 배정한 것이 근대적 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무작위 배정의 힘은 통계학 서가에서 본 대로 알려진 교란은 물론 아무도 아직 생각하지 못한 교란까지 두 집단에 고르게 흩뿌린다는 데 있습니다. 두 집단의 계통적 차이가 치료 여부 하나로 좁혀지는 것이죠.
눈가림과 위약: 무엇을 통제하는가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자기가 진짜 약을 받았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증상 보고가 달라지고, 의사가 배정을 알면 진찰과 판정이 미묘하게 기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자와 연구자 양쪽이 배정을 모르게 하는 이중 눈가림과, 겉모습이 같은 위약(placebo)이 붙습니다.
흔한 오해 하나를 짚고 갑시다. 위약군에서 관찰되는 호전은 전부 마음의 힘이 아닙니다. 자연 경과, 평균으로의 회귀, 보고 방식의 변화가 뒤섞인 덩어리이고, 그 덩어리를 그대로 재 두어야 치료군에서 빼낼 수 있습니다. 위약군은 마음의 효과를 증명하려고 두는 것이 아니라 약이 없어도 일어났을 변화를 계량하려고 두는 것입니다.
1상에서 4상까지
새 약이 사람에게 오는 길은 네 단계입니다. 1상은 소수를 대상으로 안전성과 다룰 수 있는 용량 범위를 봅니다. 2상은 환자 집단에서 효과의 신호와 적정 용량을 탐색하고, 3상은 수백에서 수천 명 규모로 기존 치료나 위약과 견줍니다. 허가는 보통 여기까지의 자료로 나옵니다.
그런데 3상 규모로도 수만 명 중 한 명에게 생기는 부작용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판 뒤에도 감시를 이어 가는 4상이 남고, 실제로 허가 후에 드문 위해가 드러나 사용이 제한되거나 철회되는 약이 나옵니다. 허가는 안전이 증명됐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시점까지의 이득이 알려진 위해보다 크다는 판정입니다.
근거 위계와 그 함정
근거는 무게가 다릅니다. 아래로 갈수록 교란에 취약하죠.
| 무게 | 연구 설계 |
|---|---|
| 강함 | 여러 무작위 대조 시험을 모은 체계적 문헌고찰과 메타분석입니다 |
| 중간 | 개별 무작위 대조 시험이고, 그다음이 코호트와 환자대조군 연구입니다 |
| 약함 | 증례 보고이며, 가장 아래가 전문가의 의견과 경험입니다 |
다만 위계를 기계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메타분석은 재료로 쓴 연구보다 나아질 수 없고, 재료 자체가 편향돼 있으면 편향을 정밀하게 요약할 뿐입니다. 대표적인 오염원이 출판 편향입니다. 효과가 나온 연구는 실리고 나오지 않은 연구는 서랍에 남는 경향 때문에, 문헌만 훑으면 세상은 실제보다 효과가 잘 듣는 곳처럼 보입니다. 이 구멍을 막으려고 2005년부터 주요 학술지들이 사전등록된 임상시험만 싣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주요 결과로 볼지 미리 공개해 두면, 결과를 본 뒤에 잘 나온 지표로 갈아타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관찰 연구가 뒤집힌 자리, 그리고 평균과 나
1990년대에는 폐경기 호르몬요법이 심혈관을 보호한다는 관찰 연구 결과가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2002년 대규모 무작위 시험인 여성건강계획(WHI)의 한 갈래가 조기 중단됩니다. 심혈관 이득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부 위험은 오히려 늘었기 때문이죠.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건강한 사용자 편향입니다. 호르몬요법을 택한 여성들이 애초에 더 건강하고 의료 접근성이 좋았던 것이 효과처럼 보였던 겁니다. 다만 이 결론이 모든 연령에 그대로 적용되는지, 폐경 직후 시작한 경우는 다른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반전이 베타카로틴 보충제에서도 있었습니다. 관찰 자료에서 암을 줄일 듯 보였지만, 흡연자를 대상으로 한 무작위 시험에서는 폐암이 오히려 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근거를 읽을 때의 습관 하나입니다. WHI에서 침습성 유방암은 상대적으로 약 26퍼센트 증가로 보고됐는데, 절대 수치로는 1만 인년당 30건에서 38건 수준이었습니다. 상대위험은 크기를 부풀려 들리게 하고 절대위험은 실제 몫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시험이 알려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평균 효과입니다. 나이도 동반 질환도 다른 내가 그 평균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별개의 판단이고, 그 판단을 함께 하는 자리가 진료실이죠. 근거중심의학은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일이 아니라 최선의 근거와 임상 경험과 환자의 가치를 겹쳐 놓는 작업이라는 정의가, 이 서가가 다음으로 다룰 건강 리터러시의 출발점이 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근거 위계의 꼭대기에는 대규모 무작위 시험이 있지만, 희귀질환처럼 그런 시험을 설계할 수 없는 영역도 있습니다.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치료를 미루는 것과 약한 근거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해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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