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도구 2강. 약은 어떻게 듣는가
약은 몸에 없던 능력을 넣어 주지 않습니다. 이미 몸에 있는 스위치를 조금 더 세게, 또는 조금 덜 누를 뿐이죠.
풀고 시작
약은 몸의 스위치에 달라붙습니다
약이 병을 고치는 방식은 생각보다 소박합니다. 몸 안에 이미 돌아가고 있는 회로의 부품을 붙잡아 신호를 키우거나 줄이는 것이죠. 붙잡히는 부품은 대개 세포 표면이나 내부의 수용체(receptor), 아니면 화학 반응을 돌리는 효소입니다. 수용체를 눌러 원래 신호를 흉내 내면 작용제(agonist), 자리만 차지해 진짜 신호를 막으면 길항제(antagonist)라고 부릅니다.
이 그림을 처음 또렷하게 그린 사람은 20세기 초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입니다. 그는 병원체나 병든 세포에만 달라붙는 물질이 있다면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병만 겨눌 수 있다고 보고 그것을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라 불렀으며, "물질은 결합하지 않으면 작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혈압약인 베타차단제는 심장의 베타수용체를 막고,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스타틴은 간에서 콜레스테롤을 만드는 효소를 억제하며, 아스피린은 통증과 염증 신호를 만드는 효소를 막습니다. 표적이 다르면 약이 다른 것이죠.
먹은 약이 표적에 닿기까지
문제는 표적에 닿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약은 흡수(absorption), 분포(distribution), 대사(metabolism), 배설(excretion)이라는 네 단계 여정을 거치는데, 이 여정을 다루는 분야를 약동학(pharmacokinetics)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삼킨 약은 주로 소장에서 흡수된 뒤 곧장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문맥이라는 혈관을 타고 간을 먼저 통과하거든요. 간에는 사이토크롬 P450이라 불리는 효소 무리가 있어 낯선 화합물을 부지런히 분해합니다. 그래서 삼킨 양의 상당 부분이 표적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고, 이것을 초회통과효과라고 부릅니다. 같은 약이라도 먹는 양과 주사하는 양이 다른 이유가 여기 있죠. 분해된 약과 그 대사물은 대개 신장을 거쳐 소변으로 빠져나가는데, 간이나 신장의 기능이 떨어진 사람에게 약이 더 오래 머무는 이유도 같은 경로에서 나옵니다.
용량이 약과 독을 가릅니다
16세기 의사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아니게 만드는 것은 오직 용량뿐"이라고 썼습니다. 약리학이 500년 동안 이 문장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약의 효과는 양을 늘릴수록 완만한 S자를 그리며 올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평평해집니다. 더 넣어도 효과는 늘지 않는데 독성은 계속 올라가는 구간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래서 약의 안전성은 효과를 내는 용량과 해를 내는 용량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즉 치료 지수(therapeutic index)로 가늠합니다. 두 용량이 넉넉히 벌어진 약은 다루기 편하지만, 항응고제 와파린이나 심장약 디곡신처럼 간격이 좁은 약은 혈중 농도를 재 가며 조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 조정은 개인의 신장 기능과 나이, 함께 먹는 약을 모두 계산에 넣어야 하는 일이라, 원리를 아는 것과 내 용량을 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뒤쪽은 진료의 몫이죠.
자몽주스가 밝혀낸 상호작용
1989년 캐나다 온타리오의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 연구팀은 혈압약과 알코올의 상호작용을 보려다 난처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참가자가 술맛을 눈치채면 눈가림이 깨지니 무언가로 맛을 덮어야 했고, 실험실 냉장고에 있던 자몽주스를 골랐죠. 그런데 자몽주스를 마신 참가자들의 혈중 약물 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높게 나왔습니다. 자몽에 든 성분이 장에서 약을 분해하던 효소를 억눌러, 평소 같으면 걸러졌을 양까지 몸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우연한 발견이 알려 준 교훈은 넓습니다. 약은 서로의 대사 속도를 바꿀 수 있고, 그 상대는 다른 약만이 아니라 음식이나 건강기능식품일 수도 있습니다. 성요한풀 같은 일부 생약은 반대로 분해 효소를 늘려 함께 먹은 약의 효과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복용 중인 약이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처방약뿐 아니라 영양제와 상비약까지 모두 답해야 하죠. 다음 강에서는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병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를 끝내는 도구, 백신을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어떤 약은 사람마다 효과와 부작용이 크게 갈리고, 그 차이의 일부는 대사 효소 유전자에서 옵니다. 처방 전에 유전형을 확인하는 방식이 널리 퍼진다면 어디까지가 정밀의료이고 어디부터가 과잉검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