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지 / 의학과 인체 / 질병의 원리 1강. 어디부터가 병인가

질병의 원리 1강. 어디부터가 병인가

진단 기준의 숫자가 한 칸 내려간 날, 수백만 명이 하루아침에 환자가 되었습니다. 몸은 어제와 똑같았는데 말이죠.

풀고 시작

문제 1. 건강검진 결과지에 적힌 정상 참고치는 대체로 어떻게 정해질까요?
참고치의 출발점은 건강하다고 본 사람들의 분포이고, 그 가운데 95퍼센트를 정상으로 부르는 관행이 표준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 스무 명 중 한 명은 정의상 범위를 벗어나죠. 세포 수준의 절벽이나 국제 고정값이 아니라 사람이 고른 선입니다.

체액에서 세균으로, 다시 분자로

2천 년 가까이 서양 의학의 표준 답안은 체액설이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네 체액의 균형이 깨진 상태를 병으로 보았고, 그래서 치료는 균형을 되돌리는 일, 즉 피를 빼거나 토하게 하는 일이었죠. 이 틀에서 병은 몸 전체의 상태였지 특정 장기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전환은 19세기에 일어납니다. 피르호(Rudolf Virchow)는 병의 주소를 세포로 끌어내렸고, 파스퇴르와 코흐는 특정 미생물이 특정 병을 일으킨다는 세균설을 세웠습니다(그 과정은 생물학 미생물과 면역 1강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1949년 폴링(Linus Pauling)은 겸상적혈구빈혈이 헤모글로빈 분자의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이며 논문 제목에 분자병(molecular disease)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병의 주소가 몸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분자로 좁혀진 것입니다. 표적은 정확해졌지만, 대신 어디까지를 병으로 부를지에 대한 경계 문제가 새로 생겼습니다.

병과 아픔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의학은 세 단어를 구분합니다. 질병(disease)은 검사와 병리로 확인되는 몸의 이상이고, 아픔(illness)은 환자가 실제로 겪는 고통의 경험이며, 환자 역할(sickness)은 사회가 그 사람을 아픈 사람으로 인정하는 지위입니다. 셋은 자주 어긋납니다. 고혈압은 수치가 높아도 대개 아무 느낌이 없어서 침묵의 살인자라 불리고, 반대로 만성 통증은 몸이 분명히 아픈데 영상 검사가 깨끗한 경우가 흔하죠. 어느 쪽도 가짜가 아닙니다. 질병은 데이터에 있고 아픔은 사람에게 있는데 의료는 둘 다 다뤄야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낯선 신호가 있다면 검색창이 아니라 의료인의 진료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정상치는 자연이 아니라 통계입니다

참고치가 분포의 가운데 95퍼센트라면, 정의상 건강한 사람 스무 명 중 한 명은 어떤 항목에서 범위를 벗어납니다. 검사 항목이 스무 개면 아무 문제 없는 사람도 평균 한 개쯤 빨간 글씨를 받게 되죠. 종합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흔한 이유의 큰 부분이 이 산수입니다. 물론 혈압이나 콜레스테롤처럼 결과와의 관계가 오래 연구된 지표는 단순 분포가 아니라 위험을 기준으로 선을 다시 긋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선은 자연에 새겨진 절벽이 아니라 사람이 고른 값이고, 근거가 쌓이면 다시 움직입니다.

원인과 위험 요인 사이

감염병에서는 범인을 지목하기 쉽습니다. 결핵균이 없으면 결핵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심근경색이나 2형 당뇨에는 그런 단일 범인이 없습니다. 흡연, 혈압, 혈중 지질, 유전, 나이가 각자 확률을 밀어 올릴 뿐이죠. 1965년 힐(Austin Bradford Hill)은 상관을 인과로 읽으려 할 때 따져볼 항목을 정리했습니다. 관련의 세기, 재현성, 시간 순서, 용량 반응 관계, 생물학적 개연성 같은 것들입니다. 흡연과 폐암은 이 항목을 두루 만족해 인과로 인정되었습니다. 반면 자궁경부암에서 사람유두종바이러스 감염은 사실상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감염된 사람의 대다수는 암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죠. 원인 하나가 병 하나를 만든다는 그림은 감염병에서만 잘 맞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정의를 넓히면 환자가 늘어납니다

기준선을 조금만 내려도 환자 수는 크게 변합니다. 그래서 진단 기준 개정은 언제나 논쟁을 부릅니다.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한국의 갑상선암입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초음파 검진이 널리 퍼지면서 갑상선암 발생률은 여러 배로 뛰었지만 갑상선암 사망률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찾아낸 병변의 상당수가 평생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암이었다는 뜻이고, 이것을 과잉 진단(overdiagnosis)이라 부릅니다. 오진과는 다릅니다. 병은 실제로 있지만, 찾지 않았더라면 환자가 되지 않았을 병이죠. 물론 조기 발견으로 목숨을 구하는 암도 분명히 있어서, 검진은 이익과 손해를 함께 저울에 올려야 합니다. 3강에서 이 저울을 다시 봅니다.

그렇다면 건강은 무엇일까요. 1948년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를 넘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로 정의했습니다. 이상은 높지만 이 기준대로면 사실상 아무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011년 후버(Machteld Huber) 등은 건강을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능력으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틀을 들고 다음 강에서는 인류가 가장 오래 상대해 온 병, 감염병으로 들어갑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폴링이 1949년에 겸상적혈구빈혈을 두고 분자병이라 부른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병의 주소는 몸 전체에서 세포로, 다시 분자로 좁혀져 왔고 폴링의 명명은 그 마지막 단계를 상징합니다. 모든 유전병이 그렇게 설명된다는 일반화나 세균설을 대체하려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문제 2. 검사 수치는 정상인데 통증이 계속되는 상황을 본문의 구분으로 설명하면 무엇일까요?
질병은 검사와 병리로 확인되는 이상이고 아픔은 환자가 겪는 경험이라 서로 어긋날 수 있습니다. 검사가 깨끗한 만성 통증은 아픔이 있는 쪽이며, 무증상 고혈압은 정반대 사례입니다.
문제 3. 건강한 사람이 종합검진에서 이상 소견을 하나쯤 받게 되는 통계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운데 95퍼센트를 정상으로 자르면 건강한 사람도 항목당 약 5퍼센트 확률로 벗어납니다. 스무 개를 검사하면 평균 한 개가 걸리는 셈이죠. 장비 오차나 기관의 의도가 아니라 기준 설정 방식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문제 4. 사람유두종바이러스와 자궁경부암의 관계를 원인과 위험 요인의 구분으로 옳게 설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감염 없이 자궁경부암이 생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필요조건에 가깝지만, 감염된 사람의 대다수는 자연 소실되어 암이 되지 않습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구분해야 원인과 위험 요인의 차이가 보입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진단 기준을 낮추면 일찍 관리받는 사람이 늘지만 병이 아닐 사람도 환자가 됩니다. 이 두 손익을 무엇으로 비교해야 공정할까요.

이전: 조절과 방어 4강 · 다음: 질병의 원리 2강

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