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3강. 선 하나가 만드는 것
국경은 땅 위에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합의하거나 강요한 결과이고, 그 선이 어디에 그어졌는지가 이후 백 년을 좌우합니다.
풀고 시작
자연 국경이라는 말의 정치
산맥과 강과 해안선이 나라를 갈라 준다는 생각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자연 국경이라는 말 자체가 종종 주장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유행한 자연 국경론은 라인강과 알프스와 피레네가 프랑스의 원래 경계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지리의 발견이 아니라 영토 요구를 자연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자연물은 생각보다 나쁜 경계입니다. 강은 굽이를 옮기고, 홍수 한 번에 유로가 바뀌어 어제까지 이쪽이던 땅이 저쪽에 붙습니다. 산맥은 분수령을 기준으로 나누자는 원칙이 있지만 능선과 분수령이 어긋나는 구간이 흔하고, 고갯길로 이어진 산간 마을들은 산 너머와 더 가깝게 살아 왔습니다. 자연은 선을 그어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긋고 나서 자연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자로 그은 선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놀랄 만큼 직선이 많습니다. 1884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베를린 회의가 아프리카 분할의 규칙을 정했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는데, 정확히는 이 회의가 실효 지배 같은 원칙과 절차를 다뤘고 실제 국경선의 대부분은 그 뒤 열강 사이의 양자 조약으로 그어졌습니다. 유럽의 협상 테이블에서 위도와 경도로 그어진 선들은 현지의 언어, 목축 이동로, 왕국의 경계와 거의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종족이 여러 나라로 쪼개지고, 사이가 나빴던 집단이 한 국가 안에 묶였습니다. 중동에서도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오늘의 국경을 그렸다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 경계는 그 문서 그대로가 아니라 전후 위임통치와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쳐 확정됐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선택입니다. 아프리카통일기구는 1964년 카이로 결의에서 식민지 시대 국경을 그대로 존중하기로 합니다. 그 선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조정을 시작하면 연쇄 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죠. 이 결정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한편 국경의 자의성만으로 이후의 갈등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론도 강합니다. 식민 통치의 방식, 자원 분포, 독립 후 제도가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죠. 배경은 세계사 탈식민지화 강에 있습니다.
바다에도 선이 있습니다
육지의 선이 굳은 뒤 무대는 바다로 옮겨 갔습니다. 1982년 채택되어 1994년 발효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이 오늘의 문법입니다. 해안 기선에서 12해리까지가 영해로 연안국의 주권이 미치고, 200해리까지가 배타적경제수역(EEZ)입니다.
여기서 자주 오해가 생깁니다. EEZ는 영토가 아닙니다. 어업과 해저 자원에 대한 주권적 권리일 뿐이고 다른 나라 선박의 항행 자유는 유지됩니다. 그럼에도 분쟁이 치열한 이유는 면적 때문입니다. 반지름 200해리의 원은 43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습니다. 바위섬 하나를 섬으로 인정받으면 남한 면적의 네 배가 넘는 바다가 딸려 오는 셈이죠. 그래서 협약 제121조 3항이 결정적입니다. 사람이 살 수도 독자적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도 없는 암석은 EEZ와 대륙붕을 가지지 못한다는 조항인데, 무엇이 섬이고 무엇이 암석인지의 해석이 곧 분쟁의 본체가 됩니다. 게다가 바다가 좁으면 양쪽 200해리가 겹치고, 중간선으로 나눌지 해안선 길이 같은 사정을 반영할지를 두고 다시 대립합니다.
분쟁 당사자들이 드는 근거도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발견해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주장, 조약으로 넘겨받았다는 주장, 오랜 역사적 권원이 있다는 주장,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주장, 주민의 자결권을 앞세우는 주장입니다.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에 대한 자동 규칙은 없습니다. 국제재판은 대체로 조약 문언과 실효적 지배의 증거를 중시하는 편입니다. 다만 영유권 자체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투려면 양쪽이 모두 관할권에 동의해야 하고, 해양법협약이 따로 마련해 둔 강제 절차마저 당사국이 제298조에 따라 경계 획정 같은 사안을 미리 제외해 둘 수 있습니다. 법이 있어도 법정에 가지 않는다는 이 구조가, 국경 분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이유의 큰 부분입니다.
국경은 선에서 그물이 되었습니다
세계화가 국경을 지울 것이라는 예상은 절반만 맞았습니다. 냉전이 끝난 뒤 오히려 물리적 장벽과 울타리는 늘었습니다. 자본과 상품과 데이터에는 문턱이 낮아지는 동안 사람의 이동에는 문턱이 높아지는 비대칭이 자리 잡은 것이죠.
동시에 국경의 위치도 달라졌습니다. 심사는 경계선이 아니라 출발지 공항의 발권 창구에서, 사전 승객 정보 시스템에서, 생체 정보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루어집니다. 유럽연합은 안쪽 검문을 없애는 대신 바깥 경계와 인접국 협력에 힘을 실었습니다. 국경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선에서 그물로 형태를 바꾼 셈입니다. 이 그물이 기후로 인한 이동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다음 강에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국경선을 지금의 종족과 언어 분포에 맞게 다시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더 평화로울까요. 아니면 어떤 선을 그어도 소수자는 남고 다시 같은 문제가 생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