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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3강. 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가

왜 그렇게 하시냐고 물으면 가장 흔히 돌아오는 답이 있습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죠.

풀고 시작

문제 1. 반 헤넵이 통과의례에서 찾아낸 세 단계를 순서대로 옳게 배열한 것은?
반 헤넵은 이전의 지위에서 떼어 내고, 아무 지위도 아닌 중간에 머물게 한 뒤, 새 지위로 되돌려 넣는 구조가 세계 곳곳의 성인식과 결혼과 장례에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봤습니다. 나머지 보기는 특정 전통의 절차 이름처럼 그럴듯하지만 그가 제시한 도식은 아닙니다.

신조보다 먼저 있던 것

1889년 스코틀랜드의 성서학자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가 『셈족의 종교 강의』에서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주장을 폈습니다. 고대 종교에서 중요했던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함께 하느냐였다는 것이죠. 신조와 교리 문답은 한참 뒤에 정리된 것이고, 사람들은 먼저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입니다. 이 관점을 극단까지 밀고 간 사람이 인도학자 프리츠 스탈입니다. 그는 남인도에서 베다 의례를 직접 기록하면서, 참가자들이 동작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규칙만은 정확히 지킨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의례는 자기 규칙을 따를 뿐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어츠나 로이 라파포트 같은 학자들은 의례야말로 의미가 생산되는 자리라고 봤죠. 다만 한 가지는 공유됩니다. 믿음이 실천을 낳는다는 순서는 보편 법칙이 아니라 근대 이후에 익숙해진 하나의 그림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유대교의 할라카나 이슬람의 샤리아처럼 올바른 실천을 중심에 두는 전통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행하느냐가 신앙 서술의 중심에 놓입니다.

문지방을 넘는 절차

아르놀드 반 헤넵은 1909년 『통과의례』에서 아주 단순한 도식을 제안했습니다. 지위가 바뀌는 모든 자리에는 분리와 전이와 재통합의 세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년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고, 이름도 옷도 없는 상태로 얼마간 머무르게 하고, 성인의 이름을 주어 되돌려보내는 식이죠. 이 도식의 가운데 토막을 파고든 사람이 빅터 터너입니다. 그는 잠비아의 은뎀부 사람들과 지내며 중간 단계를 리미널리티(liminality), 곧 문지방의 상태라 불렀습니다. 이 구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지위와 서열이 지워지고 벌거벗은 평등 상태에 놓입니다. 터너는 여기서 생기는 강렬한 동료 감각을 코뮤니타스(communitas)라 이름 붙였습니다.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형제처럼 되는 경험, 신병 훈련소나 수련회에서 생기는 결속이 같은 구조입니다. 일상의 질서를 잠시 해체해야 새 질서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일상어에서 신화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뜻하지만, 종교학에서 이 말은 전혀 다르게 쓰입니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신화가 현재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헌장 노릇을 한다고 봤습니다. 어느 씨족이 어느 땅을 갖는지가 기원 이야기 안에 이미 새겨져 있는 식이죠. 레비스트로스는 다르게 읽었습니다. 신화는 삶과 죽음처럼 화해되지 않는 모순을 다루는 사고의 작업이며, 이야기의 표면이 아니라 요소들의 관계가 진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아데는 신화를 태초의 시간을 지금 여기에 되살리는 장치로 봤고요.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전통은 자기 서사를 일어난 그대로의 역사로 이해하고, 어떤 전통은 상징으로 읽으며, 같은 전통 안에서도 이 문제로 교단이 갈립니다. 종교학은 어느 독해가 옳은지를 판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이야기가 공동체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봅니다.

죽이고 나누는 자리

가장 해석이 갈리는 실천이 희생 제의입니다. 타일러는 신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고 봤고, 로버트슨 스미스는 신과 인간이 한 상에서 나눠 먹는 친교의 식사라고 봤습니다. 위베르와 모스는 1899년 연구에서 제물을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를 잇는 매개로 분석했습니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사냥 집단의 살해 경험에서 기원을 찾았고,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 내부의 폭력이 한 희생양에게 몰리며 평화가 회복되는 구조를 제안했습니다. 지라르의 가설은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인류학계의 수용은 제한적이라는 점도 함께 알아 둘 만합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의가 과거의 유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슬람의 이드 알 아드하나 네팔과 인도 일부 지역의 힌두 사원 제의처럼 동물을 잡아 이웃과 나누는 실천이 이어집니다. 동시에 여러 전통 안에서 곡물이나 상징물로 대체하려는 흐름과 살생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도 오래전부터 함께 있어 왔습니다.

세속의 제단

종교학이 의례를 연구하면 뜻밖의 곳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1967년 논문에서 미국에 시민 종교가 있다고 썼습니다. 취임 선서와 국립묘지 참배와 건국 서사가 신학 없이도 종교와 비슷한 구조로 작동한다는 관찰이죠. 스포츠도 자주 예로 듭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 유니폼과 노래, 원정 응원이라는 순례, 세대를 넘겨 물려주는 소속감까지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강의 문제가 되돌아옵니다. 닮았다는 것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능만으로 종교를 정의하면 결속을 만드는 모든 활동이 종교가 되어 버리죠.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것을 종교의 확장이 아니라 의례라는 도구로 사회를 읽는 방법으로 씁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런 세속 의례가 늘어나는 사회에서 정작 종교 자체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데이터로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로버트슨 스미스와 프리츠 스탈이 공유하는 관점은?
두 사람 모두 사람들이 먼저 함께 행했고 설명은 나중에 붙었다는 쪽을 강조했습니다. 다만 스탈은 의례에 의미가 아예 없다는 데까지 밀고 갔고, 기어츠나 라파포트처럼 의례를 의미 생산의 자리로 보는 반론도 강합니다.
문제 2. 터너가 말한 코뮤니타스가 발생하기 쉬운 국면은?
문지방 상태에서는 참가자들의 기존 지위가 벗겨지면서 평등한 동료 감각이 생기고, 터너는 이를 코뮤니타스라 불렀습니다. 순례길이나 신병 훈련소의 결속이 같은 구조이며 일상 질서로 돌아가면 대개 옅어집니다.
문제 3. 신화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독해로 옳은 것은?
레비스트로스는 이야기의 표면이 아니라 요소들 사이의 관계 구조를 읽어 삶과 죽음 같은 대립을 다루는 논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첫 보기는 말리노프스키, 둘째 보기는 엘리아데의 독해에 해당합니다.
문제 4. 국가 기념식이나 스포츠 응원을 의례로 분석할 때 본문이 덧붙인 주의는?
기능만으로 종교를 규정하면 사람을 결속시키는 모든 활동이 종교가 되어 경계가 무너지므로,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를 종교의 확장이 아니라 사회를 읽는 분석 도구로 씁니다. 1강에서 본 기능적 정의의 대가가 여기서 다시 나타납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정확히 반복되는 동작이 있다면, 그 동작은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요.
  • 우리 사회에서 지위가 잠시 지워지는 리미널한 시간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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