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지 / 종교학 / 종교란 무엇인가 2강. 믿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2강. 믿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학자는 신자에게 당신이 옳다고도 틀렸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이 왜 당신에게 참으로 경험되는지를 묻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종교학에서 말하는 방법론적 무신론은 어떤 태도일까요?
이것은 연구자의 신앙 여부를 묻지 않는 작업상의 약속이며,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기획과는 무관합니다. 신자의 증언은 배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일차 자료로 다뤄집니다.

같은 대상을 다루는 두 개의 학문

1870년 런던 왕립연구소에서 막스 뮐러가 종교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문장입니다. 원래 언어학에서 나온 말인데, 뮐러는 이것을 종교에 옮겨 놓았습니다. 자기 전통 하나만 알고서는 그 전통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학과 종교학의 갈림길이 생깁니다. 신학은 특정 전통 안에 서서 그 전통의 진리를 정합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고, 종교학은 여러 전통을 밖에서 비교하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서술하는 작업입니다. 어느 쪽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던지는 질문이 다릅니다. 신학은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고, 종교학은 사람들이 신이 무엇을 요구한다고 말해 왔는지를 묻습니다.

판단을 괄호에 넣는 기술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1967년 『신성한 덮개』에서 이 태도를 방법론적 무신론이라 불렀습니다. 니니안 스마트처럼 방법론적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선호한 학자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요점은 같습니다. 순례자가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면 종교학은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판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체험이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고 어떤 언어로 서술되며 공동체 안에서 어떤 권위를 얻는지를 추적합니다. 여기서 자주 오해가 생깁니다. 판단 유보는 종교가 틀렸다는 조용한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위 판정을 학문의 권한 밖으로 밀어 두었기 때문에, 신앙인의 자료와 비신앙인의 자료를 같은 기준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죠.

안에서 보기와 밖에서 보기

언어학자 케네스 파이크가 음소론과 음성학이라는 말에서 잘라 만든 한 쌍의 용어가 있습니다. 에믹(emic)은 그 문화 내부의 개념과 논리로 서술하는 관점이고, 에틱(etic)은 여러 문화를 비교하기 위해 외부에서 만든 분석 범주로 서술하는 관점입니다. 라마단의 단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신자들은 이것을 신을 향한 경외심을 기르는 의무로 설명합니다. 연구자는 같은 실천을 집단 결속을 강화하는 비용이 큰 행위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차례상 앞에서 절하는 이유를 물어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효를 다하는 도리라는 답이 돌아오지만, 연구자는 같은 절을 친족의 서열을 해마다 재확인하는 장치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하나가 거짓인 것이 아니라 층위가 다릅니다. 다만 두 관점의 관계를 두고 종교학 내부에서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신자가 자기 이야기로 인정할 수 없는 서술은 좋은 서술이 아니라고 했고, 러셀 매커천 같은 비판자들은 내부자의 승인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학문이 아니라 대변인이 된다고 반박했습니다.

성스러움을 그 자체로 다루려던 시도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20세기 중반 시카고 대학에서 미국 종교학을 하나의 독립 분과로 자리 잡게 한 사람입니다. 그의 핵심 개념은 성현(hierophany), 곧 성스러운 것이 세속의 사물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돌이나 나무가 그냥 돌과 나무이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무엇이 되는 순간이죠.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 사회나 심리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범주라고 주장했습니다. 뒤르켐이 사회로, 프로이트가 무의식으로 종교를 풀어내던 흐름에 맞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한 비판이 나왔습니다. 조너선 스미스와 매커천 등은 엘리아데가 세계 각지의 자료를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 내 보편 패턴을 만들었고, 그 결과 식민 지배나 경제 조건 같은 현실이 지워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스러움이 실재한다고 전제하는 순간 방법론적 무신론의 약속을 어기고 신학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었습니다.

뇌에서 시작하는 설명과 그 한계

1990년대부터 전혀 다른 방향의 연구가 등장합니다. 인지종교학은 종교가 왜 어디에나 있는지를 인간 마음의 기본 설계에서 설명하려 합니다. 스튜어트 거스리는 사람이 구름에서 얼굴을 보듯 세계에 행위자를 투사한다고 봤고, 저스틴 배럿은 위험을 놓치는 것보다 헛짚는 것이 안전하기에 진화한 과민한 행위자 탐지 성향을 제안했습니다. 파스칼 보이어는 신 관념처럼 최소한으로만 반직관적인 개념이 기억과 전승에 유리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진화적 설명은 다시 두 갈래로 갈립니다. 종교는 다른 인지 능력의 부산물이라는 쪽과, 집단 결속에 기여했기에 선택되었다는 쪽입니다. 다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이 설명들은 종교가 왜 쉬운지는 말해 주지만 왜 하필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이런 형태의 종교가 나왔는지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실험 표본이 특정 사회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도 있고요. 그리고 기원을 밝히는 일이 진위를 판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모든 이론이 결국 되돌아가는 자리, 사람들이 실제로 반복하는 몸짓을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본문이 정리한 신학과 종교학의 차이로 가장 적절한 것은?
두 학문은 자료나 연조가 아니라 서 있는 자리와 던지는 질문이 다릅니다. 신학은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묻고, 종교학은 사람들이 신의 요구를 어떻게 말해 왔는가를 묻습니다.
문제 2. 라마단 단식을 신을 향한 경외를 기르는 의무로 서술하는 것은 어떤 관점일까요?
그 전통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언어를 그대로 따라간 서술이므로 에믹에 해당합니다. 같은 단식을 결속을 강화하는 비용이 큰 행위로 분석하면 외부의 비교 범주를 쓴 에틱 서술이 됩니다.
문제 3. 엘리아데의 현상학적 접근에 제기된 비판으로 옳은 것은?
비판의 핵심은 탈맥락화와 검증 불가능성이며, 성스러움을 실재로 전제해 방법론적 무신론과 충돌한다는 지적도 함께 나옵니다. 기능 환원은 오히려 엘리아데가 맞서 싸운 뒤르켐 계열을 향한 비판입니다.
문제 4. 인지종교학과 진화적 설명이 잘 다루지 못하는 문제는?
이 접근은 종교의 보편적 용이성을 설명하는 데 강하지만, 역사적 다양성과 개별 전통의 구체적 내용까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나머지 보기는 모두 이 연구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답해 온 질문들입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신자가 자기 이야기로 인정할 수 있는 서술이라야 좋은 서술이라는 기준은 학문의 겸손일까요, 아니면 비판의 포기일까요.
  • 종교의 기원을 뇌의 작동으로 설명하는 일과 종교의 진위를 판정하는 일은 정말 별개일 수 있을까요.

이전: 종교란 무엇인가 1강 · 다음: 종교란 무엇인가 3강

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