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전통 2강. 유대교 분파에서 제국의 종교로
처형당한 갈릴래아 사람의 제자들이 삼백 년 뒤 로마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 앉게 됩니다.
풀고 시작
신앙의 고백과 역사학의 물음
나사렛 예수를 다루는 방식은 두 층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를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이자 사람이 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 뒤의 부활을 신앙의 중심에 둡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입니다. 역사학은 방법상 부활 같은 초자연적 주장을 판정 대상에서 아예 빼 놓고, 사료 비평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만 다룹니다.
그렇게 남는 최소한의 뼈대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합니다. 그는 1세기 갈릴래아의 유대인이었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고, 본시오 빌라도 아래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 밖의 거의 모든 세부는 지금도 논쟁 중이죠. 슈바이처는 1906년에 19세기의 연구사를 정리하면서 학자들이 저마다 자기 시대를 닮은 예수를 그려 냈다고 꼬집었습니다.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다 물 밑에서 자기 얼굴을 봤다는 유명한 비유는 몇 해 뒤 조지 티렐이 남긴 말입니다. 이 강의가 지키는 규칙은 하나입니다.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할 것인가
초기의 예수 운동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 안의 한 흐름이었습니다. 따르던 사람들은 성전에 드나들었고 안식일을 지켰죠. 그런데 이방인이 몰려들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터집니다. 들어오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즉 할례를 받고 음식 규정을 지켜야 하는가였습니다.
바울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므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49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들의 회의는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정리했고, 바울은 안티오키아에서 식탁 교제 문제로 베드로와 정면으로 부딪히기까지 합니다. 이 결정 하나로 이 운동은 한 민족의 경계에 묶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사실상의 제2 창시자로 보는 연구자도 있고, 예수 운동 안에 이미 있던 논리가 펼쳐진 것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어떤 책이 성서인가
2세기 중반, 마르키온이라는 인물이 폭탄을 던집니다. 구약의 신과 예수가 아버지라 부른 신은 다른 존재라며,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를 잘라 낸 목록을 제시한 것이죠. 여기에 영지주의 계열 문헌들까지 쏟아지자 교회는 무엇이 우리 책인지 답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이레나이우스는 복음서가 넷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27권 목록이 그대로 등장하는 가장 이른 문서는 367년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신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정경은 회의 하나가 어느 날 발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 동안 실제로 읽히고 쓰인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목록은 지금도 교단마다 다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제2경전이라 부르는 문헌들을 포함하고 개신교는 포함하지 않으며, 성서의 무오성을 어떻게 이해할지도 교파마다 갈립니다. 책 이름부터 갈라져서 이 강의가 쓰는 마가와 누가를 가톨릭에서는 마르코와 루카로 적습니다. 어느 쪽이 표준인지는 신학의 문제이지 이 강의가 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황제가 소집한 회의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던진 명제가 제국을 흔듭니다.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났다기보다 지어진 존재이며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었죠. 반대편은 그렇다면 구원자가 피조물이 되어 버린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로 주교들을 불러 모읍니다. 황제가 교리 회의를 소집한 첫 장면이었죠. 채택된 표현이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였습니다.
논쟁은 그 뒤로도 수십 년 이어졌고,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성령까지 포함한 오늘의 신경 형태가 다듬어집니다. 451년 칼케돈은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두 본성으로 정식화했는데,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은 콥트와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계열 교회는 그 뒤 별도의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20세기의 대화에서는 서로가 같은 것을 다른 언어로 말해 왔다는 공동 선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교리는 조용히 자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싸우면서 굳어졌습니다.
국교가 되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313년 밀라노에서 관용이 선포되고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니케아 신앙이 제국의 공식 신앙이 됩니다. 얻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박해가 끝났고 조직과 재산과 법적 지위가 생겼으며 확산 속도가 달라졌죠. 잃은 것도 분명했습니다. 이단이 신학적 오류를 넘어 국가의 범죄가 되었고, 소수 신앙과 이교 제의가 밀려났으며, 교회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같은 시기에 사막으로 걸어 나간 수도원 운동을 국교화에 대한 내부의 반작용으로 읽는 시각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긴장은 다음 강의 분열과 개혁으로,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다루는 과목으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한 종교가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될 때 얻는 것과 잃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클까요. 이 질문은 오늘의 정교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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