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종교 3강. 종교인가 철학인가
조상 앞에 술을 올리는 일이 예법인지 예배인지를 두고 유럽 선교사들은 백 년 넘게 다퉜고, 그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풀고 시작
제사는 예법일까 예배일까
교황청은 18세기 초에 중국인 개종자의 조상 제사를 금지했고, 강희제는 이에 반발해 선교를 제한했습니다. 그 금지가 철회된 것은 1939년입니다. 논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진 이유는 유교가 종교의 조건을 애매하게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창시자가 교단을 세운 적도 없고 사후 세계에 대한 교리도 희박하지만, 하늘과 조상을 향한 정교한 의례 체계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고대의 천(天)은 왕조에 통치를 맡기고 부덕하면 거둬들이는 천명의 주체로 여겨졌으니 인격적 색채가 뚜렷했죠. 정작 공자 자신은 그 영역에 말을 아꼈습니다. 사람도 아직 못 섬기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고 되물었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이 태도를 근거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수양과 실천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반면 종교학 쪽에서는 교리보다 의례와 공동체를 기준으로 삼으면 유교도 종교의 특징을 충분히 갖췄다고 봅니다. 결국 1강에서 봤듯이 종교라는 범주 자체가 근대 서구에서 만들어진 자로 재고 있다는 문제가 여기서 다시 튀어나옵니다.
세 사람이 갈라 놓은 길
유교를 한 덩어리로 보면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공자는 어질게 대하는 마음인 인(仁)과 그 마음이 몸을 갖춘 형식인 예(禮)를 짝으로 놓고, 이름에 걸맞게 행하면 질서가 선다고 봤습니다. 맹자는 여기서 인간 본성 쪽으로 밀고 갔습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가슴이 철렁하는데, 그 순간 계산이 개입할 틈이 없다는 것이죠. 이 타고난 싹을 길러야 한다는 성선의 주장이었고, 하늘이 민심을 통해 뜻을 드러내므로 폭군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위험한 결론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순자는 정반대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은 그냥 두면 욕망을 좇으므로 예라는 인위적 장치로 다듬어야 한다고 봤고, 하늘에 대해서도 도덕적 의지가 없는 자연 질서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폭군이 다스린다고 겨울이 없어지지는 않으며, 기우제는 비를 부르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정돈하는 형식이라는 것이었죠. 한 전통 안에 하늘을 인격으로 보는 길과 자연으로 보는 길이 나란히 있었던 셈입니다.
리와 기가 짜 놓은 질서
12세기의 주희는 흩어져 있던 이 자원을 하나의 체계로 묶었습니다. 만물에는 그래야 할 이치인 리(理)가 있고 그것이 재료인 기(氣)를 만나 구체적인 사물이 된다는 구도인데, 여기서 도덕은 취향이 아니라 우주의 결이 됩니다. 그가 골라 묶은 네 권의 책이 시험 과목이 되면서 이 체계는 사상에서 제도로 넘어갔습니다. 관료가 되려면 이 해석을 외워야 했고, 관료가 되려면 외운 사람이 곧 지배층이 됐죠. 조선은 이 흐름을 가장 철저하게 밀어붙인 사회였습니다. 주자가례가 사대부의 관혼상제를 규율했고, 왕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정파가 갈리는 논쟁이 국정을 흔들었으며, 서원과 향약이 지방 사회를 촘촘히 엮었습니다. 종교냐 철학이냐를 묻기 전에, 이 체계가 사람들의 하루와 죽음과 가족 관계를 실제로 규율했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도의 두 얼굴
도교라는 말은 서로 다른 두 계보에 함께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노자』와 『장자』의 사유입니다. 다스리려 들수록 어지러워지니 억지로 하지 않는 무위를 말하고, 나비 꿈에서 깨어난 장자처럼 옳고 그름의 경계를 흔들어 놓죠. 다른 하나는 2세기에 등장한 교단 운동입니다. 장도릉이 세운 오두미도는 병을 고치고 죄를 참회시키며 조직을 갖췄고, 이후 도교는 신선이 되어 죽지 않기를 목표로 삼는 수련 전통을 발달시켰습니다. 광물을 달여 단약을 만드는 길이 있었고, 몸 안의 기를 돌려 단을 이루는 길이 있었습니다. 도관에는 도사가 상주하며 신들에게 문서를 올리는 의례를 집전했고, 방대한 경전 총서까지 편찬됐죠. 두 계보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후대에는 깊이 얽혀서, 노자 자신이 신으로 모셔지고 그의 책이 경전이 됐습니다. 그래서 철학의 도가와 종교의 도교를 깔끔히 갈라놓는 구분법이 근대 학계의 정리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남은 청구서와 다시 쓰기
유교가 남긴 문제를 건너뛰면 서술이 정직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평생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따르라고 요구한 규범이 있었고, 재가한 여성의 자손에게 벼슬길을 막은 제도가 있었으며, 남편을 따라 죽은 여성을 기려 정문을 세우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사 연구는 조선 전기까지 재산을 자녀가 고루 나누고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내는 관행이 있었으나, 17세기 이후 부계 종법이 확산되며 딸이 상속과 제사에서 밀려났다고 봅니다. 교리보다 제도가 지위를 결정했다는 뜻이죠. 이에 대한 응답도 전통 안에서 나왔습니다. 현대 신유학은 유교의 관계 윤리를 개인주의의 대안으로 다시 읽으려 하고, 유교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 연구자들은 위계 규범과 배려 윤리를 분리해 내려는 작업을 이어 갑니다. 명절 차례상을 두고 성균관이 간소화를 권고한 최근의 장면도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전통이 스스로를 고쳐 쓰는 방식이죠. 다음 강에서는 이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가 한 나라 안에서 부딪히며 만든 유례없는 지형으로 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사후 세계에 대한 교리가 거의 없고 의례만 정교한 전통을 종교라고 부를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걸까요?
- 어떤 전통의 규범이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면, 그 전통을 비판할 때 겨냥해야 할 대상은 경전일까요 제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