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종교 4강. 한 나라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어느 하나가 압도하지 못한 채 개신교와 불교와 천주교가 나란히 경쟁하고, 그 옆에서 굿판과 자생 종교가 함께 굴러갑니다.
풀고 시작
굿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종교사에서 가장 오래됐으면서 가장 낮은 대접을 받아 온 것이 무속입니다. 경전도 교단도 없지만 구조는 뚜렷합니다. 무당이 신령을 불러 몸에 받고, 노래와 춤으로 대접하며, 요구를 듣고 달래 돌려보내는 흐름이 굿의 뼈대죠. 무당이 되는 길도 갈려서, 신병을 앓고 내림굿으로 신을 받는 쪽과 집안 대대로 물려받는 쪽이 있습니다. 모셔지는 신령의 목록도 놀랍도록 열려 있습니다. 산신과 장군신은 물론이고 최영이나 관우 같은 역사 인물까지 신격으로 들어오죠. 근대에 들어 무속은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지목돼 공식 무대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사와 개업 앞에서 날을 받는 관행, 입시철의 기도, 곳곳의 점집이 여전히 작동합니다. 일부 굿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기도 하죠. 종교학은 여기서 공식 종교의 언어로 잘 처리되지 않는 불안과 액운의 문제를 무속이 계속 떠맡아 왔다고 읽습니다.
나라가 들여온 부처, 나라가 밀어낸 부처
불교는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에, 그리고 6세기 신라에 들어왔습니다. 신라의 수용이 가장 늦고 극적이었는데,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됐다고 전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수용의 주체입니다. 민간에서 번져 올라간 것이 아니라 왕실이 위에서 받아들여 처음부터 국가와 결합했습니다. 황룡사에 거대한 탑을 세워 주변 나라를 누르겠다는 발상이 그 성격을 잘 보여 주죠. 물론 국가 종교로만 굳은 것은 아니어서, 원효는 파격적인 행보로 백성 속에 들어가 나무아미타불을 퍼뜨렸고 여러 교학의 다툼을 화해시키려 했습니다. 고려에서 불교는 국교의 자리에 올라 승과를 통해 관료 체계와 맞물렸고, 몽골 침입기에는 대장경을 새기는 국가적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뒤집습니다. 출가를 제한하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거둬들이고 종파를 통폐합하면서 불교는 국가 지원을 잃었죠. 승려가 도성에 들어가는 것조차 오래 막혔다가 19세기 말에야 풀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교는 산으로 물러나 왕실 여성과 민간의 후원 속에 명맥을 이었고, 유교 의례가 채우지 못한 죽음과 내세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선교사보다 먼저 도착한 신앙
18세기 후반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베이징을 거쳐 들어온 한문 교리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양의 학문으로 다뤘지만 점차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겼고,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신자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곧 터졌습니다. 충돌 지점은 교리 논쟁이 아니라 제사였습니다. 3강에서 본 의례 논쟁의 결과로 조상 제사가 금지된 상태였고, 1791년 윤지충이 어머니 상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사건은 조선 사회에서 부모를 저버린 반역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대규모 박해가 이어져 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신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자들은 이 시기를 순교의 역사로 기억하고, 역사학은 여기에 정치적 요인을 함께 봅니다. 서학이 특정 정파와 얽혀 있었기 때문에 박해가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도 쓰였다는 것이죠.
개신교는 왜 그렇게 빨리 컸을까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입니다. 백 년쯤 뒤 개신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 집단 가운데 하나가 됐는데, 이 속도는 아시아에서 예외적입니다. 배경은 여러 겹입니다. 선교사들은 포교보다 학교와 병원을 앞세워 신뢰를 얻었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과 여성도 읽는 한글 성서가 결정적인 통로가 됐습니다. 교회를 현지인이 운영하고 스스로 전도하게 한 선교 방침 덕분에 조직도 빨리 자랐죠. 여기에 역사적 조건이 겹칩니다. 개신교가 자리 잡던 시기는 나라가 무너지던 시기였고, 삼일운동 민족대표 서른세 명 가운데 개신교가 열여섯 명, 천도교가 열다섯 명이었다는 사실이 그 결합을 보여 줍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북에서 내려온 신자들이 남쪽 교회의 중심이 됐고, 산업화기에 도시로 밀려든 이주민들에게 교회는 사람 사귈 자리와 복지를 함께 제공했습니다. 급성장의 그늘도 정직하게 봐야 합니다. 교회 세습과 재정 투명성 논란, 정치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문제, 종교인 소득 과세를 둘러싼 오랜 논쟁은 지금도 개신교 내부에서 먼저 제기되고 있는 쟁점들입니다.
스스로 만든 종교들, 그리고 유례없는 경쟁
한국은 종교를 받기만 한 나라가 아닙니다.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사람 안에 한울을 모신다는 가르침으로 신분 질서를 흔들었고, 1894년 농민전쟁의 사상적 배경이 됐으며, 1905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 삼일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증산 계열의 여러 교단이 갈라져 나왔고, 1916년 박중빈이 연 원불교는 둥근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교를 생활 종교로 재편하려 했습니다. 이런 자생 종교들을 다룰 때 학계는 참과 거짓을 판정하는 대신 신종교 운동이라는 분석 틀을 씁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시기에 새 종교가 무더기로 등장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관찰되며, 사회 변동을 읽는 지표로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종교 지형은 이렇게 경쟁적일까요. 조선의 유교 질서가 무너진 뒤 어느 하나도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여러 전통이 동시에 근대를 맞았고, 식민 지배와 전쟁과 도시화가 만든 공백을 각 종교가 교육과 의료와 돌봄으로 메우며 나란히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 종교를 가진 사람은 인구의 40퍼센트 안팎이고 개신교와 불교가 각각 15에서 20퍼센트, 천주교가 6에서 8퍼센트 선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무종교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다음 강부터는 이 경쟁의 한 축을 이루는 아브라함 전통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공식 종교를 가진 사람도 이사할 때 날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종교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새로 생긴 종교를 평가할 때 오래됐다는 사실 말고 어떤 기준을 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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