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3강. 거대 담론이 물러난 자리
싸울 대상이 흐릿해지자 작가들은 광장에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방이 생각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풀고 시작
적이 사라진 다음에 무엇을 쓰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1991년 소련이 무너지죠. 앞 강에서 본 문학은 명확한 상대를 향해 쓰였습니다. 그 상대가 흐릿해지자 문단에는 기이한 공백이 생깁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후일담 문학이라 불렀습니다. 운동을 하다 돌아온 사람들이 그 시절을 되짚는 소설들이 한동안 이어졌거든요.
하지만 더 큰 변화는 다른 쪽에서 왔습니다. 소설의 관심이 사회의 구조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역사에서 기억으로, 집단에서 취향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 이동을 두고 문학이 왜소해졌다는 진단과, 비로소 개인을 발견했다는 평가가 지금까지도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는 편이 정직합니다.
세 사람이 연 감각
신경숙(1963~)은 『풍금이 있던 자리』(1993)로 90년대 문체의 인장을 찍습니다. 말줄임이 많고 호흡이 느리며 감정을 다 말하지 않는 문장이었죠. 그런데 그의 대표작 『외딴방』(1995)은 흥미롭게도 정반대 방향을 봅니다. 구로공단 여공으로 일하며 야간학교에 다니던 십대 시절을 다시 꺼내 쓴 작품이거든요.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든 90년대 문학이 노동의 기억과 만나는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은희경(1959~)은 『새의 선물』(1995)에서 열두 살 소녀를 화자로 세웁니다. 이 아이는 울지 않고 관찰합니다. 어른들의 위선을 냉정하게 분류하는 이 목소리는 90년대 문학이 얻은 새로운 어조였죠. 김영하(1968~)는 1995년에 등단한 뒤 이듬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로 이름을 알립니다. 자살을 도와주는 사람이 화자인 이 소설은 도시적이고 건조하며 어딘가 영화 같았습니다. 셋의 문장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계몽하지 않고, 대변하지 않으며, 독자를 학생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평이 권력이라는 말
2000년 전후 문단은 안에서부터 시끄러워집니다.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입니다. 쟁점은 이랬습니다. 몇몇 대형 출판사가 문예지와 문학상과 비평 지면을 동시에 쥐고 있는데, 그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비평가가 같은 출판사 작가를 상찬한다면 그것은 비평일까요. 이런 글을 두고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반론도 분명했습니다. 출판사가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지면을 마련하는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권력이라는 규정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것이었죠. 이 논쟁은 승패 없이 흐지부지되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다만 문학이 순수한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상과 지면과 판매가 얽힌 제도라는 사실만은 공개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2015년 여름, 흔들린 것
2015년 6월 소설가 이응준이 신경숙의 단편 「전설」(1996)의 일부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번역본과 지나치게 닮았다고 공개적으로 제기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초기 해명이 오히려 논란을 키웠고, 표절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문단의 방식이 도마에 올랐거든요.
이 사건이 남긴 것은 한 작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15년 전 문학권력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구조의 물음이 구체적인 사례로 돌아온 것이었죠. 이후 문단에서는 등단 제도와 비평의 독립성을 다시 묻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젊은 작가와 독자 들이 기존 문예지 바깥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경계가 흐려지는 자리
제도의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1990년대 PC통신에서는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같은 작품이 종이책 문단과 무관하게 거대한 독자를 모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박민규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과 『카스테라』(2005)에서 만화적 상상력과 문예지 문법을 태연하게 뒤섞었죠.
2010년대에는 SF가 본격적으로 문학의 안쪽으로 들어옵니다. 배명훈, 김보영, 정세랑을 거쳐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에 이르면 장르와 순수를 나누던 선이 실질적인 의미를 잃습니다. 새로운 문예지들이 창간되고 독립출판과 온라인 연재가 발표 통로로 자리 잡으면서, 등단이라는 단 하나의 문도 여러 개의 문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흐름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마지막 강에서 확인하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거대 담론이 물러난 자리를 개인의 내면이 채웠다는 진단은 90년대 문학을 왜소해졌다고 볼 수도, 비로소 넓어졌다고 볼 수도 있게 합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한 사람의 방을 정밀하게 쓰는 소설과 사회의 구조를 겨냥한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정치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