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 1강. 언문일치라는 사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했다"라는 문장의 끝맺음은, 백 년 전 조선에서는 아직 아무도 갖고 있지 않던 물건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신소설, 계몽이라는 이름의 상품
1906년 만세보에 연재된 이인직의 『혈의 누』는 조선 소설이 "지금 여기"의 사건을 정면으로 무대에 올린 초기 사례로 꼽힙니다. 청일전쟁의 포연 속에서 가족을 잃은 소녀 옥련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신학문을 배웁니다. 이런 작품들을 신소설이라 부릅니다. 이해조의 『자유종』(1910)에서는 부인들이 밤새 모여 앉아 교육과 여성의 지위를 토론하고,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에서는 동물들이 회의를 열어 인간을 꾸짖습니다. 공통점이 뚜렷하죠. 신교육, 자유결혼, 미신 타파라는 목적지가 이야기 앞에 미리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편한 사실이 붙습니다. 그 문명개화의 방향이 자주 일본을 가리켰다는 점입니다. 이인직 본인이 이완용의 비서로 병합 교섭에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계몽이 곧 근대이고 근대가 곧 일본이라는 등식이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선에 이미 깔려 있었던 셈입니다. 신소설을 그저 귀여운 습작으로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무정이 놓인 자리, 그리고 그 한계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됩니다.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이 은사의 딸 박영채와 부잣집 딸 김선형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야기입니다. 새로웠던 것은 삼각관계가 아니라 인물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망설이는 시간을 소설이 통째로 허락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소설에서 개인의 내면이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소설 후반, 수해 현장에서 인물들이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짐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확 옮겨 갑니다. 결말을 자세히 옮기지는 않겠습니다만, 연애의 언어가 계몽의 언어에 자리를 내주는 이 전환을 두고 평가가 갈립니다. 근대적 개인을 발명해 놓고 곧바로 민족이라는 대의에 반납했다는 비판이 한쪽에 있고, 식민지에서 개인이 홀로 설 자리가 애초에 없었음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라는 독법이 다른 쪽에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연재된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근대문학의 출발이 지배 권력의 지면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아이러니는 이후 내내 따라다닙니다.
"~더라"에서 "~했다"로
고전 산문의 문장은 "~하더라", "~이러라"로 끝났습니다. 이야기꾼이 청중 앞에서 전해 주는 목소리가 문장에 남아 있는 것이죠. 근대소설은 이 목소리를 지웁니다. 말과 글을 일치시키자는 언문일치는 표기법 문제가 아니라, 서술자가 무대 뒤로 숨는 문제였습니다. 김동인은 훗날 자신이 과거시제 종결과 삼인칭 대명사 "그"를 정착시켰다고 회고했는데, 그 자평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새 문체를 의식적으로 설계한 세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이 국한문 혼용을 밀어붙였고, 주시경과 그 제자들의 국어 연구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으로 이어집니다. 문체는 저절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졌습니다.
잡지와 신문이 작가를 만들었습니다
작가가 되려면 실을 곳이 있어야 합니다. 최남선의 『소년』(1908)이 문을 열었고, 도쿄 유학생들이 만든 『창조』(1919), 그리고 『폐허』(1920), 『백조』(1922), 종합지 『개벽』(1920)이 이어집니다.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장편 연재라는 무대도 생겼습니다. 연재는 작가를 먹여 살렸지만 동시에 회마다 독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압력을 걸었죠. 이 매체 조건은 여성 작가에게도 좁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김명순은 1917년 『청춘』 현상공모에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근대 소설을 발표한 첫 여성 작가로 꼽히고, 나혜석은 1918년 「경희」를 내놓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당대 문단의 조롱과 스캔들 속에 밀려났고, 오랫동안 문학사에서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정전이 누구를 기억하는가 자체가 논쟁거리라는 사실을 이 대목이 보여 줍니다.
서구는 일본을 거쳐 왔습니다
이 세대의 서구 문학 지식은 대부분 일본어를 통과한 것이었습니다. 도쿄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 일본어 번역본으로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읽고 돌아왔고,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프랑스 상징주의를 조선에 들여올 때도 경로는 같았습니다. 이중 번역이니 오독이 섞였겠죠. 하지만 이 우회로가 손해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의 언어를 두 번 거치며 읽는 사람은 원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말로 고쳐 쓸 수밖에 없습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가 정형시의 틀을 깨려 애쓴 신체시였듯이, 어색한 번역투가 오히려 새 문장을 실험하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벼려진 언어가 1920년대에 어떤 시로 폭발하는지, 다음 강에서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식민지 권력의 기관지 지면에서 근대문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학의 성취를 얼마나 깎아내리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매체와 작품은 따로 평가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