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지 / 한국문학 / 고전 산문 3강. 겪은 일을 적는다는 것

고전 산문 3강. 겪은 일을 적는다는 것

왕이 문장의 문체를 문제 삼아 신하들에게 반성문을 받아 낸 나라가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곧 정치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에서 임금이 문제 삼은 대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정조는 짧고 감각적이며 잡스럽다고 본 소품 문체와 패관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습니다. 신하들에게 자송문을 받아 냈고 이옥 같은 문인은 과거에서 불이익을 받았으니, 문제는 부정행위나 외교 문서가 아니라 문장의 스타일 그 자체였습니다.

궁중의 시간을 적은 사람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열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갔고, 1762년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예순이 넘어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그때의 일을 한글로 적어 나갑니다. 이 글이 놀라운 것은 사건의 참혹함 때문만이 아닙니다. 서술 전략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목격자로 세우면서 동시에 당사자로 두고, 누구를 원망하는 대신 그때 무엇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되짚는 방식으로 씁니다. 여기서 독법이 갈립니다. 한쪽은 이 글을 궁중 비극을 안에서 증언한 회고록으로 읽습니다. 다른 한쪽은 정치적 화를 입은 친정 풍산 홍씨 집안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서술 전체를 끌고 간다고 봅니다. 두 독법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변호하려는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기억해 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기가 문명 비평이 되는 순간

1780년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 축하 사절을 따라 압록강을 건넜고, 예정에 없던 열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 기록이 『열하일기』입니다. 보통의 사행 기록이 의례와 일정을 적을 때, 박지원은 길바닥을 봅니다. 그는 청에서 본 가장 볼 만한 것이 깨진 기와 조각과 똥거름이라고 썼습니다. 깨진 기와로 담장 무늬를 만들고 똥을 반듯하게 쌓아 거름으로 쓰는 그 실용의 태도가, 오랑캐라 깔보던 나라의 진짜 힘이라는 뜻입니다. 벽돌과 수레와 도로를 집요하게 관찰하는 이 시선이 이용후생의 문제의식입니다. 게다가 이 여행기 안에는 「호질」과 「허생전」 같은 소설이 통째로 들어앉아 있습니다. 여행기이면서 소설집이고 문명 비평인 이 잡종성이야말로 당시 기준으로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문체가 정치가 된 사건

그 위험은 곧 현실이 됩니다. 1790년대에 정조는 가볍고 자잘한 소품체와 패관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한 고문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문체반정입니다. 젊은 관료들은 자송문, 그러니까 스스로를 꾸짖는 글을 지어 바쳐야 했고, 박지원에게도 반듯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뜻이 전해졌습니다. 이옥이라는 문인은 문체를 이유로 과거에서 밀려나고 군역에 보내지기까지 했습니다. 왜 임금이 문장의 스타일에 이토록 신경을 썼을까요. 한쪽에서는 흐트러진 문체를 바로잡아 학문과 기강을 세우려 한 개혁 군주의 조치로 봅니다.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서학이 스며드는 통로를 문체 단속이라는 이름으로 눌렀다고 읽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문장의 형식이 사상의 형식이라는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규방에서 쓰인 글과 한글 편지

같은 시기, 공식 기록에 이름이 잘 오르지 않던 사람들도 부지런히 쓰고 있었습니다. 언간이라 부르는 한글 편지가 대표적입니다. 1998년 안동에서 발굴된 이응태의 무덤에서는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한글 편지가 나왔습니다. 남들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며 사느냐고 묻는 그 편지는 400여 년의 시차를 지우고 읽는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규방에서 나온 글도 만만치 않습니다. 부러진 바늘을 두고 제문의 형식으로 애도한 「조침문」이나, 바늘과 자와 가위와 인두 같은 바느질 도구들이 서로 제 공을 다투는 「규중칠우쟁론기」는 사소한 사물에 인격과 격식을 부여하는 발랄한 실험입니다. 여성의 글쓰기가 사적 영역에 갇혀 있었다는 통념은 이 텍스트들 앞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일기라는 형식이 남긴 것

일기는 문학이 되기 어려운 형식처럼 보입니다. 순서대로 적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계축일기」는 인목대비가 유폐되던 시간을 안쪽에서 기록했고, 「산성일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사람들의 나날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사건을 요약하지 않고 하루씩 통과하기 때문에, 이 글들에는 나중에 붙일 수 있는 해석이 아직 붙지 않은 날것의 시간이 남습니다. 겪은 일을 적는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 고르는 일이며, 그 고름 자체가 하나의 문학적 선택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아예 글이 아니라 소리로 전승되던 이야기가 어떻게 문자에 정착했는지를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한중록을 읽는 두 갈래 독법을 가장 정확하게 짝지은 것은 무엇일까요?
한쪽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의 증언으로 읽고, 다른 쪽은 화를 입은 친정 집안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서술을 이끈다고 봅니다. 이 글은 한글로 쓰인 회고록이므로 허구 소설이나 구전 설화, 의례서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문제 2.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깨진 기와와 똥거름을 볼 만한 것으로 꼽은 뜻은 무엇일까요?
깨진 기와로 담장을 꾸미고 똥을 쌓아 거름으로 쓰는 태도에서 그는 청의 실제 저력을 보았습니다. 벽돌과 수레와 도로를 관찰한 이용후생의 문제의식과 같은 맥락이며, 청을 깎아내리려는 서술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 3. 언간과 규방 문학이 우리 문학사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안동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나 조침문, 규중칠우쟁론기는 형식 실험과 정서적 밀도를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한글 편지는 조선 전기부터 오갔고 언간은 공식 문서가 아니었으므로, 남는 시사점은 공식 기록 바깥의 글쓰기가 두터웠다는 사실입니다.
문제 4. 계축일기나 산성일기 같은 일기 문학의 가치로 본문이 강조한 것은 무엇일까요?
일기는 사건을 요약하지 않고 하루씩 통과하기 때문에 나중에 덧붙는 해석이 아직 입혀지지 않은 시간을 보존합니다. 공식 견해의 전달이나 화려한 수사가 이 형식의 미덕은 아니며, 무엇을 남기고 지울지 고르는 선택 자체가 문학적 행위가 됩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1. 자기를 변호하려는 사람의 기록은 믿을 수 없는 걸까요, 아니면 가장 절실해서 가장 자세한 걸까요. 우리가 남기는 기록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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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