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산문 1강. 이야기의 뼈대들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알에서 나오거나 하늘에서 내려올까요. 신화는 족보이기 전에 정치 문서였습니다.
풀고 시작
알에서 태어난 왕들
고조선의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이고, 고구려의 주몽은 알에서 나왔으며, 신라의 박혁거세도 알에서, 가락국의 수로도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상자 속 알에서 나옵니다. 우연이 이 정도로 반복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형식입니다. 건국 신화는 대체로 같은 뼈대를 씁니다. 시조는 하늘이나 신적 존재와 이어진 혈통을 갖고, 태어나는 방식부터 보통 사람과 다르며, 버려지거나 쫓기는 시련을 통과한 뒤에야 나라를 세웁니다. 이 뼈대의 쓸모는 아주 분명합니다. 지금 왕좌에 앉은 사람의 권력이 완력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서 왔다고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건국 신화는 조상 자랑이기 이전에 권력을 정당화하는 문서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문법이 나라 단위에서만 쓰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을 수호신의 내력담이나 성씨의 시조 설화도 같은 뼈대를 나눠 씁니다. 이야기의 형식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렸습니다.
정사가 버린 것을 주워 담은 책
승려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엮은 시기는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짓밟히고 난 뒤였습니다. 제목의 유사(遺事)가 이미 남겨진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유교적 기준으로 쓰인 정사가 괴이하다며 밀어낸 이야기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단군 이야기가 가장 오래된 형태로 남은 것도, 향가 열네 수가 살아남은 것도 이 책 덕분이니, 우리는 정사가 아니라 야사에 빚을 진 셈입니다. 다만 일연을 그저 이야기꾼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는 인용한 문헌의 이름을 밝히고 서로 다른 전승을 나란히 적어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사료로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평가는 지금도 갈립니다. 설화를 모아 둔 창고로 읽을 수도 있고, 몽골 지배 아래에서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다시 세우려 한 기획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설화가 소설이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전기(傳奇)는 글자 그대로 기이한 것을 전한다는 뜻으로, 귀신과 저승과 용궁 같은 비현실을 다루되 인물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한문 서사 양식입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대체로 그 첫 자리에 놓이는 작품이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입니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등을 돌리고 승려가 되어 떠돈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경주 금오산에 머물던 시절 이 작품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지금 전하는 다섯 편에서 주인공들은 이미 죽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옛 왕조의 넋을 만나고, 저승의 왕과 논쟁을 벌이고, 용궁 잔치에 불려 갑니다. 중국 구우의 『전등신화』에서 자극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산 자와 죽은 자가 끝내 같은 세계에 머물지 못한다는 쓸쓸함은 이 작품 고유의 온도입니다. 다만 최초의 소설이라는 자리를 두고는 이견이 있습니다. 나말여초의 『수이전』에 실렸던 「최치원」 같은 전기를 소설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게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에서는 오래 잊혀 있다가 일본에 남아 있던 판본이 20세기에 소개되면서 되살아났습니다.
꿈이라는 안전한 법정
몽유록은 주인공이 꿈속에서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 사연을 듣고 깨어나는 액자 양식입니다. 「원생몽유록」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임금과 신하로 짐작되는 이들이 모여 회한을 토로하고, 병자호란 뒤에 나온 「강도몽유록」에서는 강화도에서 죽은 여성들의 넋이 차례로 나서서 자기를 지켜 주지 못한 자들을 겨눕니다. 왜 하필 꿈일까요. 꿈은 화자에게 알리바이를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꿈에서 들은 말이라고 물러설 자리가 생기는 것이죠. 몽유록은 검열이 촘촘한 사회에서 픽션이 발명한 방어 장치이자 우회로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위험할수록 이야기는 형식을 발명합니다.
누가 읽느냐가 무엇을 쓰느냐를 정합니다
한문으로 쓰인 소설의 독자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대부 남성으로 좁혀집니다. 반면 훈민정음 이후 자라난 국문 서사는 궁중 여성과 사대부가 부녀자를 거쳐 나중에는 중인과 평민까지 독자로 끌어들입니다. 문자가 달라지면 독자가 달라지고, 독자가 달라지면 이야기가 다루는 관심사도 달라집니다. 한문 전기가 개인의 고독과 이념의 좌절을 파고들 때, 국문 소설은 가문과 혼인, 신분과 복수처럼 삶을 직접 죄는 조건들을 다룹니다. 이 갈라짐이 다음 강에서 한글 소설이 왜 그토록 폭발적으로 팔렸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정사가 걸러 낸 이야기를 야사가 주워 담은 덕에 우리가 단군 이야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공식 기록이 걸러 내고 있는 이야기는 어디에 쌓이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