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가 1강. 천 년 전의 노래가 남은 방식
신라 사람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스물다섯 편뿐입니다. 나머지가 왜 사라졌는지가 이 강의 진짜 주제입니다.
풀고 시작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으려던 시도
자기 문자가 없던 시절에 자기 말로 된 노래를 적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라 사람들이 찾아낸 답은 한자를 두 가지 용도로 쪼개 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글자는 뜻을 가져다 쓰고, 어떤 글자는 소리만 가져다 썼습니다. 이렇게 우리말의 어순과 조사까지 한자로 받아 적은 표기법을 향찰(鄕札)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 표기가 사용법을 정리한 규칙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시대 내내 향가는 사실상 읽히지 않는 글자 덩어리였고, 20세기에 들어서야 오구라 신페이가 1929년에, 이어 양주동이 1942년 『조선고가연구』에서 본격적인 해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읽는 매끄러운 향가 번역문은 확정된 원문이 아니라 해독안입니다. 학자마다 다르게 읽는 구절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스물다섯 편이라는 숫자
『삼국사기』에는 888년 진성여왕이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해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엮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정리할 만큼 노래가 많았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책은 제목만 남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전하는 스물다섯 편은 전혀 다른 길로 살아남았습니다. 열네 편은 일연이 13세기 말에 엮은 『삼국유사』 안에, 열한 편은 1075년 혁련정이 쓴 승려 균여의 전기 『균여전』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향가는 노래책이 아니라 설화집과 전기의 곁다리로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때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며 인용한 덕분에 건져진 것이죠. 고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까지 향가의 형식으로 보아 스물여섯 편으로 세는 견해도 있습니다.
제망매가와 처용가
가장 널리 읽히는 두 편은 성격이 정반대입니다.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지은 「제망매가」는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놀랍도록 절제돼 있습니다. 한 가지에 났다가 이른 가을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잎에 남매를 견주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뒤, 미타찰에서 다시 만날 것이니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고 끝맺습니다. 울부짖는 대신 자연의 이미지 하나로 죽음을 통과시키는 솜씨입니다. 반면 「처용가」는 훨씬 기이합니다. 밤늦게 놀다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는 그 유명한 대목에서, 화자는 분노 대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느냐며 물러섭니다. 그 물러섬 앞에서 역신이 감복해 달아났다는 설화가 붙어 있고, 그래서 처용의 얼굴은 이후 오랫동안 역병을 막는 부적으로 대문에 붙었습니다. 노래가 문학이면서 동시에 주술이던 시대의 흔적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버틴 고려가요
고려의 노래는 사정이 또 다릅니다. 고려 사람들에게도 자기 말을 적을 문자는 여전히 없었고, 그래서 고려가요는 수백 년을 오직 입으로만 건너왔습니다. 이 노래들이 글자를 얻은 것은 훈민정음이 나온 뒤입니다. 성종 때 엮인 『악학궤범』을 비롯해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 같은 궁중 음악 책에 실리면서 비로소 기록됐습니다. 짧아도 백 년, 길게는 수백 년이 지나서, 그것도 원래 부르던 사람들이 아니라 궁중 악사들의 손을 거쳐 적힌 셈입니다. 후렴이 유난히 발달한 것도 이 구전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청산별곡」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나 「가시리」의 "위 증즐가 대평셩대"는 뜻보다 소리로 기억을 붙들어 두는 장치였습니다.
남녀상열지사라는 낙인
문제는 받아 적는 손이 유학자의 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궁중 음악을 정비하면서 고려 노래의 가사가 음란하다고 판단했고, 『성종실록』에는 이런 노래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부르며 고쳐 쓰거나 걷어내자는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쌍화점」이나 「만전춘별사」처럼 애정 표현이 노골적인 작품이 대표적인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남은 고려가요는 체를 두 번 통과한 것입니다. 궁중에서 부를 만한 노래여야 했고, 그다음 유학자의 검열을 견뎌야 했습니다. 「청산별곡」의 정처 없는 떠돎과 「가시리」의 짧고 서늘한 이별이 그토록 사무치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걸러지고 남은 목소리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걸러진 쪽이 무엇을 노래했는지는 이제 알 길이 없습니다. 남은 쪽에도 빈자리가 있습니다. 「가시리」와 「동동」, 「서경별곡」처럼 널리 읽히는 고려가요는 대개 여성의 목소리로 이별과 그리움을 말하지만, 지은 사람이 실제로 여성이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남고 이름은 남지 않은 셈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공백 위에 등장해 육백 년을 버틴 형식을 만나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지금 남은 고전 시가는 기록할 힘을 가진 쪽이 골라 남긴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남기고 있는 노래와 글은 백 년 뒤에 누구의 기준으로 걸러져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