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가 3강. 길게 늘여 부른 노래
시조가 마흔다섯 자에 승부를 걸었다면, 가사는 아예 끝을 정하지 않고 출발했습니다.
풀고 시작
끝을 정하지 않고 출발하는 형식
가사(歌辭)의 규칙은 놀라울 만큼 헐렁합니다. 네 덩어리씩 끊어 읽는 가락을 계속 이어 가면 그만이고, 길이 제한이 없습니다. 시조가 마흔다섯 자 안에서 반전을 만들어야 하는 형식이라면, 가사는 하고 싶은 말이 끝날 때까지 늘여도 되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가사는 기행과 유배와 훈계와 신세 한탄처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시조가 순간을 찍는다면 가사는 길을 따라갑니다. 시작을 어디로 잡을지는 아직 논쟁 중인데, 조선 초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보는 견해가 널리 쓰이지만 고려 말 나옹화상이 지었다는 「서왕가」를 앞에 놓는 시각도 있습니다. 형식이 헐렁하니 어디까지를 가사로 볼지도 헐렁해지는 셈입니다.
정철이라는 이름
가사를 대표하는 이름은 송강 정철(1536~1593)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격렬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관직과 유배와 은거를 반복했습니다. 이 이력이 그대로 작품이 되었습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쓴 「관동별곡」은 관동팔경을 도는 여정을 따라가는데, 금강산과 동해의 절경을 묘사하다가도 결국 백성을 걱정하고 임금을 생각하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풍경을 보는 눈과 관리로서의 자의식이 계속 겹칩니다. 반대로 창평에 물러나 있던 시절에 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는 화자가 아예 여성으로 바뀝니다. 버림받은 여인이 임을 기다리며 계절을 세는 목소리로 임금을 향한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죠. 신하가 임금에게 직접 하소연할 수 없을 때 사랑의 언어를 빌려 오는 이 방식을 충신연주지사라고 부릅니다. 후대의 평가는 갈립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는 상찬과, 결국 권력을 향한 구애의 문학이라는 냉담한 시선이 함께 있습니다.
규방가사, 여자들이 쓴 두루마리
가사의 진짜 확장은 사대부의 손을 떠난 뒤에 일어났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규방가사(내방가사)라 불리는 흐름이 자리를 잡습니다. 짓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여성이었습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몸가짐을 일러 주는 「계녀가」류가 있었고, 봄에 산에 올라 꽃전을 부쳐 먹고 하루를 노는 「화전가」류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인쇄되지 않았습니다. 두루마리에 붓으로 베껴서 이웃과 친척 사이를 돌았고, 잘 지은 작품은 여러 집안에서 필사되며 퍼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방가사가 여성에게 자기 이름으로 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지면이었다는 점입니다. 한시는 남성의 공식 문장이었고 시조는 짧았습니다. 가사는 길고 규칙이 느슨해서, 시집살이의 고달픔이든 친정에 대한 그리움이든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규원가」의 경우 허난설헌의 작품이라는 전승과 다른 인물의 작품이라는 설이 함께 있어, 작자 문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한시를 쓴다는 것
한편 같은 시대에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시를 썼습니다. 한시는 취미가 아니라 공적 언어의 시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려면 한문을 다뤄야 했고, 문집에 남는 것도 한시였습니다.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 방대한 한시를 남겼고, 그중 「동명왕편」은 주몽의 건국 이야기를 장편 한시로 옮긴 작품입니다. 중국의 것을 흉내 내는 대신 우리 신화를 한시의 형식에 앉힌 셈입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1762~1836)은 더 나아갑니다. 강진 유배 시절에 쓴 「애절양」은 갓난아기와 죽은 아버지에게까지 군포를 물리는 수탈을 견디다 못해 한 남자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 사건을 정면으로 옮깁니다. 한시가 우아한 풍경화가 아니라 고발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작품입니다. 여성 한시도 있습니다.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난 허난설헌(1563~1589)의 시집은 중국에서 간행되어 널리 읽혔습니다. 조선 안에서보다 밖에서 먼저 인정받은 셈이죠.
두 개의 언어, 하나의 위계
여기서 조선 문학의 근본 조건이 드러납니다. 한 사람이 두 언어로 글을 썼습니다. 한문은 격식과 기록의 언어였고 국문은 감정과 노래의 언어였습니다. 정철도 한시를 남겼지만 그를 남긴 것은 우리말 가사였습니다. 이 위계를 정면으로 건드린 사람이 김만중입니다. 『서포만필』에서 그는 자기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워 쓰는 것은 아무리 비슷해도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고 썼고, 정철의 가사를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으로 꼽았습니다. 17세기에 나온 이 판단은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통념을 뒤집는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김만중 본인도 한문으로 글을 썼다는 점에서 이 위계는 선언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강에서는 두 언어 모두에서 밀려나 아예 적히지 않은 채로 살아남은 문학을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조선의 지식인은 공식 언어와 감정의 언어를 나누어 썼습니다. 오늘 우리도 보고서의 말과 대화의 말을 나누어 쓰는데, 백 년 뒤에 남을 우리 시대의 문학은 둘 중 어느 쪽에서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