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가 2강. 삼장 형식이 600년 간 곁에 있었다
왕조가 두 번 바뀌고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지나가는 동안, 이 짧은 형식은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습니다.
풀고 시작
마흔다섯 자짜리 그릇
시조의 뼈대는 단순합니다. 초장, 중장, 종장의 세 줄로 이루어지고 각 장은 두 덩어리씩, 그러니까 3장 6구로 나뉩니다. 글자 수는 다 합쳐 마흔다섯 자 안팎인데 이건 평균일 뿐 엄격한 규정이 아닙니다. 정작 깐깐하게 지켜지는 규칙은 딱 하나, 종장의 첫 음보를 세 글자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로 시작한다고 전하는 정몽주의 노래도 마지막 줄은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로 열립니다. 이 세 글자가 왜 중요할까요. 앞의 두 줄이 벌여 놓은 이야기를 여기서 한 번 꺾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장 첫머리는 방향을 트는 지점이고, 그래서 시조를 읽으면 마지막 줄에서 늘 작은 반전이 일어납니다. 규칙이 적고 그 하나가 결정적이라는 점, 이 가벼움이 육백 년을 버틴 비결입니다.
자연에 물러앉은 사대부의 노래
조선의 사대부에게 한시는 공식 문장이었고 시조는 물러앉아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비공식성 덕분에 시조는 그들의 속내를 담았습니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는 사계절을 네 수에 나눠 담으면서 매 수를 임금의 은혜라는 말로 닫습니다. 자연을 즐기면서도 조정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는 것이죠. 이황이 1565년에 지은 「도산십이곡」은 앞의 여섯 수에서 자연을, 뒤의 여섯 수에서 학문을 노래하고, 이이의 「고산구곡가」도 같은 계열입니다. 이런 흐름을 흔히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정점은 윤선도가 1651년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에 열 수씩, 모두 마흔 수를 배에 오르고 노를 젓고 돌아오는 하루의 순서에 맞춰 배열했습니다. 다만 이 자연을 순수한 은둔으로만 읽을지, 정치에서 밀려난 자의 자기 위안으로 읽을지는 지금도 갈리는 대목입니다.
황진이가 놓인 자리
시조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름 하나는 사대부가 아닙니다. 16세기 개성의 기녀 황진이입니다. 생몰년도 확실하지 않은 이 사람의 시조는 사대부 시조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임 오신 밤에 굽이굽이 펴겠다는 그 노래에서, 시간은 자를 수 있고 개킬 수 있는 물건이 됩니다. 관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감각으로 그리움을 말한 것이죠. 최경창에게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낸다고 노래한 홍랑도 같은 계보에 있습니다. 이들의 위치는 미묘합니다. 기녀는 신분으로는 천민이었지만 사대부와 시를 주고받는 유일한 여성 집단이었습니다.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감정을 말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통로가 하필 그 자리였다는 사실은, 조선 문학사를 읽을 때 불편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형식을 늘렸더니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자 이 단정한 그릇이 부풀기 시작합니다. 사설시조는 초장과 종장은 그대로 두고 중장을 길게 늘여 버립니다. 늘어난 자리에 들어온 것이 흥미롭습니다. 젓갈 장수와 손님이 물건 이름을 놓고 실랑이하는 장면, 시어머니 흉을 늘어놓는 며느리, 사랑에 안달하는 노골적인 몸의 언어 같은 것들입니다. 점잖은 관념어 대신 시장의 말투와 수다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죠.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대부분인데, 이는 짓는 사람이 이름을 남길 계층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형식을 조금 늘렸을 뿐인데 화자가 통째로 바뀐 셈입니다. 그릇의 크기가 담을 수 있는 사람을 정한다는 사실을 사설시조가 보여 줍니다.
시조는 읽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자주 잊히는 사실을 짚겠습니다. 시조는 종이에 눈으로 읽으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라 노래였습니다. 거문고와 장구를 갖춰 다섯 마디로 늘여 부르는 가곡창이 있었고, 반주 없이 장단만으로 세 장을 부르는 시조창이 따로 있었습니다. 시조라는 이름 자체가 시절가조에서 왔다는 설명이 유력한데, 신광수의 시에는 영조 때 이세춘이라는 가객이 서울에서 이 창법을 유행시켰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 노래책도 필요했습니다. 김천택이 1728년에 엮은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효관과 안민영의 『가곡원류』가 그렇게 나왔고, 오늘 우리가 읽는 시조는 대부분 이 가집들에서 건너온 것입니다. 20세기에 최남선과 이병기, 정인보가 시조를 다시 짓자고 나섰을 때 시조는 비로소 읽는 시가 되었습니다. 노래를 잃은 대신 활자를 얻은 셈이죠. 다음 강에서는 이 짧은 형식과 정반대로, 끝없이 늘여 부른 노래를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사설시조는 형식을 늘리자마자 전혀 다른 계층의 목소리를 담아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짧은 형식들, 예를 들어 댓글이나 짧은 영상은 누구의 목소리를 담고 누구의 목소리를 밀어내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