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지 / 한국문학 / 고전 산문 4강. 부르던 것이 읽는 것이 될 때

고전 산문 4강. 부르던 것이 읽는 것이 될 때

춘향전에는 원작자가 없습니다.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없었기 때문에 수백 년을 살아남았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작품군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판소리로 불리던 사설이 문자로 옮겨져 읽는 소설로 자리 잡은 것이 판소리계 소설이며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이 여기 듭니다. 한문 전기나 궁중 회고록, 번안 소설은 발생 경로가 전혀 다른 계열입니다.

부르던 것이 읽는 것이 됩니다

판소리는 소리꾼 한 사람과 북 치는 고수 한 사람이 마당에서 몇 시간씩 벌이는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공연의 사설이 어느 시점부터 종이에 옮겨 적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옮겨 적힌 사설은 읽히기 위해 조금씩 손질됩니다. 몸짓과 표정으로 대신하던 부분에 설명이 붙고, 관객의 추임새를 전제하던 리듬이 문장으로 정돈됩니다. 이렇게 해서 춘향가는 춘향전이, 심청가는 심청전이, 흥보가는 흥부전이, 수궁가는 토끼전이 됩니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소리가 소설로 바뀐 것이 아니라, 소리와 소설이 한동안 나란히 살았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사람은 마당에서 듣고 어떤 사람은 방각본으로 읽었으며, 들은 사람이 읽고 읽은 사람이 다시 들으면서 두 판본은 서로를 계속 고쳤습니다.

저자를 찾지 마세요

춘향전의 작가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는 답이 없고, 답이 없다는 것이 이 문학의 성격입니다. 판소리는 여러 세대의 광대들이 잘 먹히는 대목을 보태고 안 먹히는 대목을 덜어 내며 쌓아 올린 적층 문학입니다. 명창이 특별히 잘 부르고 남들이 따라 부르게 된 대목을 더늠이라 하는데, 이 더늠이 계속 얹히면서 사설이 두꺼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저자는 이름 없는 다수이고, 그 다수 안에는 청중도 들어 있습니다. 관객이 웃지 않는 대목은 다음 공연에서 사라졌으니까요. 근대 문학이 작가 개인의 서명을 앞세운다면, 판소리계 소설은 그 반대편 극단에서 만들어진 문학입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으로는 잡히지 않는 창작 방식이 실제로 작동했던 것이죠.

울다가 웃게 만드는 미학

서양 극작술은 오래 비극과 희극을 구분했습니다. 판소리는 그 구분을 대놓고 무시합니다. 딸이 목숨을 값으로 팔려 가는 애끊는 대목 바로 옆에, 뺑덕어미 같은 인물이 나와 관객을 뒤집어 놓습니다. 비장한 대목과 골계스러운 대목이 한 작품 안에서 번갈아 오는 이 구성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입니다. 몇 시간을 내리 슬프기만 하면 사람은 지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부분의 독자성이라는 개념입니다. 판소리는 전체 줄거리의 정합성보다 개별 눈대목의 밀도를 우선합니다. 잘 부르는 대목이 오면 소리꾼은 거기서 한껏 늘려 부르고, 그 대목만 따로 떼어 들어도 완결됩니다. 줄거리의 앞뒤가 조금 어긋나도, 지금 이 장면이 압도적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미학입니다.

신재효가 한 일과 지운 것

19세기에 고창의 아전 출신 재산가 신재효(1812~1884)가 이 흐르는 사설들을 붙들어 정리합니다. 그는 여섯 마당의 사설을 다듬어 문자로 고정했고, 소리꾼을 후원하고 가르쳤으며, 진채선을 길러 여성도 판소리 무대에 설 수 있게 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가 없었다면 잃어버렸을 사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평가는 갈립니다. 정리한다는 것은 고른다는 뜻이고, 고른다는 것은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듬는 과정에서 판소리 특유의 거칠고 노골적인 골계,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던 발랄함이 양반 취향에 맞게 깎였다는 비판이 오래 있어 왔습니다.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가 동시에 표준을 정하는 권력 행사이기도 하다는 문제는, 구비 문학을 다룰 때마다 되풀이해 나타납니다.

지금도 새 판이 짜입니다

판소리는 박제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여러 소리꾼이 배역을 나눠 맡는 창극이 등장했고, 1964년에 판소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에는 유네스코가 인류의 무형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1993년 영화 「서편제」가 극장에서 관객을 끌어모은 일도 이 소리의 수명을 늘렸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새로 짜는 사람들입니다. 임진택은 김지하의 담시를 판소리로 옮겨 창작 판소리의 길을 열었고, 이자람은 브레히트의 희곡을 바탕으로 「사천가」와 「억척가」를 만들어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옛 형식에 실었습니다. 적층 문학은 여전히 쌓이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 산문이고, 다음 과목에서는 이 이야기의 세계가 근대와 부딪히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판소리계 소설을 적층 문학이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명창들이 잘 부르는 더늠을 얹고 반응이 없는 대목을 덜어 내면서 사설이 세대를 거쳐 쌓였습니다. 웃지 않는 대목이 다음 공연에서 사라졌으니 청중도 사실상 공동 저자였으며, 특정 개인의 연작이나 번역과는 무관한 개념입니다.
문제 2. 판소리에서 비장한 대목과 골계스러운 대목이 번갈아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몇 시간짜리 공연에서 감정을 한쪽으로만 몰면 관객이 지치기 때문에 비장과 골계를 교차시킵니다. 이는 실수도 외래 형식의 수입도 아니며, 개별 눈대목의 밀도를 우선하는 부분의 독자성과 함께 작동하는 미학입니다.
문제 3. 신재효의 사설 정리를 두고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재효는 여섯 마당의 사설을 문자로 고정하고 소리꾼을 길러 낸 공이 크지만, 다듬는 과정에서 거칠고 발랄한 골계가 양반 취향으로 정돈됐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는 판소리의 창시자가 아니고 진채선을 길러 여성 명창의 길을 연 인물로 기억됩니다.
문제 4. 판소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와 이자람의 사천가, 억척가처럼 오늘의 소재를 옛 형식에 싣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두 마당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창극이 판소리를 대체하지도 않았으며, 무형유산 지정이 창작을 막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1. 청중이 웃지 않으면 그 대목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다듬어진 이야기와, 한 작가가 홀로 완성한 이야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알고리즘이 반응을 실시간으로 재는 오늘의 콘텐츠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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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