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 2강. 빼앗긴 들에 쓴 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되면 사람은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다른 말로 그것을 말하는 법을 발명합니다.
풀고 시작
빼앗긴 들, 그리고 소월의 옛 가락
이 강의 제목은 이상화가 1926년 『개벽』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가져왔습니다. 땅을 빼앗긴 사람이 그 땅의 봄을 노래한다는 모순이 이 시기 시의 조건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죠. 이제 그 조건 위에서 시인들이 각각 어떤 길을 골랐는지 보겠습니다.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꽃』(1925)은 지금도 가장 널리 암송되는 시집으로 꼽힙니다. 비결은 리듬에 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소리 내어 읽으면 세 마디가 규칙적으로 떨어지죠. 민요와 판소리가 몸에 새겨 놓은 옛 가락을 근대시의 활자 위에 다시 올린 것입니다. 스승 김억이 서구 상징주의를 번역해 들여오던 바로 그 시기에, 제자는 정반대 방향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내용은 더 묘합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꽃을 뿌려 주겠다고, 죽어도 울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겉은 축복이고 속은 절규죠. 이 뒤집힌 말법을 흔히 정한(情恨)이라 부릅니다. 다만 소월의 시를 곧바로 망국의 슬픔으로 환원하는 독법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실연으로 읽어도 시는 온전히 작동하고, 오히려 그 이중성 때문에 검열을 통과하며 오래 살아남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한용운의 님은 누구입니까
『님의 침묵』(1926)의 첫머리에 붙은 「군말」에서 한용운(1879~1944)은 이렇게 씁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이죠.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라고요. 작가 스스로 님을 하나로 못 박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최소 세 겹으로 읽힙니다. 떠나간 연인으로, 깨달음의 대상인 부처로, 잃어버린 조국으로요. 한용운은 승려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니 세 층이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셋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도 읽히게 만들어 놓았기에 이 시가 검열의 그물을 빠져나갔고, 동시에 그 다중성이 시를 얄팍한 구호에서 구해 냈다는 점입니다.
이상, 시를 부수러 온 사람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가 연재되자 독자들이 항의했습니다. 열세 명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한다는 문장이 반복되고, 숫자와 도형이 튀어나오고, 띄어쓰기가 사라집니다. 신문사는 서른 편 예정이던 연재를 열다섯 편에서 중단합니다. 본명 김해경, 필명 이상(1910~1937). 총독부 건축기사 출신인 그는 시를 설계도처럼 다뤘습니다.
「거울」에서 그는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가 악수할 수 없다고 씁니다. 근대적 자아가 자기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생기는 분열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준 시는 드뭅니다. 소설 「날개」(1936)까지 포함해 이상의 작업은 오래 "난해한 실패"로 취급받다가, 해방 이후 모더니즘 재평가와 함께 정전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정전이 고정된 목록이 아니라 시대마다 다시 짜이는 명단이라는 사실을 이상만큼 잘 보여 주는 경우도 없습니다.
정지용의 감각, 그리고 이름이 지워진 세월
정지용(1902~1950)은 시를 감정이 아니라 감각으로 짓습니다. 「유리창」(1930)에서 유리를 닦는 행위와 죽은 아이를 향한 슬픔이 겹치는 방식은, 슬프다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슬픔을 전달합니다. 『문장』지 추천위원으로 박목월과 조지훈, 박두진을 문단에 내보낸 것도 그였습니다. 그런데 정지용의 이름은 오랫동안 교과서에서 지워져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된 그가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해금 전까지는 「향수」 같은 대표작조차 시집이나 교과서에 실릴 수 없었습니다. 이 사정은 4강에서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감옥에서 나온 두 권의 유고
윤동주(1917~1945)와 이육사(1904~1944)는 결이 아주 다릅니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씁니다. 우물을 들여다보다 자기가 미워져 돌아서는 사람, 쉽게 시가 쓰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그 시의 화자입니다. 저항의 목소리가 아니라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책이죠. 이육사는 반대입니다. 본명 이원록인 그의 필명은 수인번호 264에서 왔다고 전해집니다. 「절정」에서 그는 칼날 위에 선 극한의 자리를 노래하고, 「광야」에서는 초인을 기다립니다.
두 사람 모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윤동주는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육사는 1944년 베이징의 감옥에서요. 대표작 다수가 유고로 남았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에야 나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시를 쓴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1925)이 있었고, 노천명과 모윤숙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다만 노천명과 모윤숙은 후기에 전쟁 협력 시를 남겼고, 그 사실을 빼고 이들을 다루는 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친일 문제는 다음 강에서 소설과 함께 정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이육사의 결의는 같은 시대를 향한 서로 다른 응답입니다. 저항의 언어와 자책의 언어 중 어느 쪽이 더 오래 읽힌다고 보시나요.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는 시에 있을까요, 읽는 시대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