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 법 2강. 교회에서 콘서트홀로
서양 음악사는 소리를 쌓아 올린 천 년이자, 그렇게 쌓은 규칙을 누가 먼저 깨느냐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풀고 시작
선율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갈라진 순간
중세 유럽 교회의 노래는 오래도록 한 줄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수십 명이 함께 불러도 선율은 하나뿐이고, 라틴어 가사에 악기 반주도 없으며, 박자를 재는 대신 말의 호흡을 따라갑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의 이름이 붙었지만 그가 이 노래들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전승에 가깝습니다.
이 단선율의 세계에도 이름이 남은 작곡가가 있습니다. 라인강가 수도원을 이끌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일흔 편 남짓한 성가와 노래극 「덕성들의 놀이」를 남겼습니다. 중세 음악 대부분이 작자 미상인데 그의 노래는 지은 사람을 알고 들을 수 있고, 음역을 넓게 오르내려 훨씬 극적입니다.
혁명은 선율을 하나 더 얹으면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성가를 다른 높이로 따라가는 정도였다가, 12세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레오냉과 페로탱에 이르면 아래 성부가 한 음을 길게 끄는 동안 위 성부가 화려하게 움직이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여러 선율이 동시에 흐르니 누가 언제 들어오는지 적어 둘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기보법이 정교해집니다. 악보는 음악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어긋나지 않게 만나려는 필요에서 자랐습니다.
바흐는 무엇을 정리했나
바흐(1685~1750)는 이 다성음악 전통의 종착역입니다. 대위법(counterpoint)이란 여러 선율이 각자 살아 움직이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게 짜는 기술인데, 바흐의 푸가는 하나의 주제가 성부마다 시차를 두고 들어와 뒤집히고 늘어나고 겹칩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1722)은 모든 조를 한 바퀴 돌며 어느 조에서든 연주가 된다는 사실을 실물로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바흐는 당대에 작곡가보다 오르간 연주자로 더 유명했고, 사후에는 그의 양식이 구식으로 취급됩니다. 악보는 교본처럼 읽혔지만 공개 무대에서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를 무대로 되돌린 사람이 스무 살의 멘델스존입니다. 1829년 베를린에서 「마태 수난곡」을 다시 무대에 올렸고, 이 연주회 이후 바흐는 서양 음악의 기초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정전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다시 꺼내는 것입니다.
형식이라는 발명품
18세기 후반, 음악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돈을 내고 들어온 시민 앞에 섰습니다. 처음 듣는 청중이 따라올 수 있어야 했고, 그 필요가 소나타 형식을 낳습니다. 첫 주제를 곡의 중심이 되는 으뜸조에 놓고 둘째 주제는 다른 조로 옮겨 거리를 벌려 두고(제시부), 그것을 흔들어 불안하게 만든 뒤(발전부), 다시 한 조로 모아 마무리하는(재현부) 구조입니다. 하이든(1732~1809)이 이 틀을 다듬었고 모차르트(1756~1791)가 그 안에서 노래하는 선율을 마음껏 풀어놓았습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습니다. 살리에리는 궁정 악장으로 존경받았고 베토벤과 슈베르트, 리스트를 가르친 교사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30년 집필)와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1979년 초연)를 거치며 널리 퍼진 창작입니다. 모차르트의 사인은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형식을 안에서 밀어 올린 사람
베토벤(1770~1827)은 하이든에게 배운 형식을 그대로 쓰면서 안에서부터 부풀립니다. 교향곡 3번 「영웅」(1804년 완성)은 이전 교향곡의 두 배 가까운 길이로 청중을 당황시켰고, 1악장에서는 발전부가 제시부보다 길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가 이 곡들을 쓰던 시기에 이미 귀가 멀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도전을 더 놀랍게 만듭니다. 1802년 그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동생들에게 보내려던 편지에 청력을 잃어 가는 고통과 죽음의 유혹을 적었습니다. 이 편지는 부치지 않은 채 사후에 발견되었습니다. 「합창」 교향곡(1824)을 초연할 때 그는 사실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국경과 조성이 흔들리다
19세기 낭만주의는 형식보다 감정과 이야기를 앞세웁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1830)은 실연한 예술가의 줄거리를 음악에 붙였고, 슈베르트는 시 한 편을 노래 한 곡으로 만드는 가곡을 하나의 장르로 세웠습니다. 동시에 음악이 국적을 갖기 시작합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1874~1879),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1899)처럼,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지역의 작곡가들이 자기 땅의 선율과 춤을 관현악에 올렸습니다.
같은 세기에 여성 음악가들을 막은 것은 재능이 아니라 제도였습니다. 파니 멘델스존 헨젤(1805~1847)은 동생 펠릭스와 같은 교육을 받고도 초기에는 자기 노래를 동생 이름으로 내야 했고, 클라라 슈만(1819~1896)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서른 중반 이후로는 작곡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전의 목록은 누가 잘 썼는가의 기록인 동시에 누가 무대와 출판에 접근할 수 있었는가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끝은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높은 음역으로 밀어 올린 바순 독주로 조용히 시작했다가, 곧 강세가 예고 없이 어긋나는 리듬과 서로 다른 화음을 한꺼번에 짓누르는 소리로 넘어갑니다. 초연에서 야유와 고성이 터졌고 객석이 소란해져 무용수들이 박자를 듣기 어려웠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를 폭동으로 부르는 것은 과장이며, 반발의 상당 부분은 음악보다 니진스키의 낯선 안무를 향한 것이었다는 견해가 지금은 우세합니다. 실제로 이듬해 연주만 했을 때는 큰 갈채를 받았습니다. 쇤베르크가 조성의 중심을 아예 없애는 길로 나아가면서, 300년간 작동하던 긴장과 해소의 문법은 유일한 답이기를 그만둡니다. 그 무렵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악보에 적히지 않은 채로 자란 또 하나의 문법이 시장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3강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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