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2강. 빛으로 연출한 극장
어두운 화면 한구석에 빛줄기 하나를 꽂는 것만으로, 그림은 관람자에게 지금 이 순간을 목격하라고 명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풀고 시작
술집 뒷방에서 성인을 찾아낸 화가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어두운 예배당에서 동전을 넣으면 조명이 켜지고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이 드러납니다. 화면 왼쪽에는 깃털 모자를 쓴 남자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동전을 셉니다. 오른쪽 어둠에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오고 하나가 손을 뻗습니다. 그 손 위쪽 벽에서 빛줄기가 비스듬히 떨어져 세리 마태오의 얼굴을 때리죠. 마태오는 나 말입니까 하는 표정으로 자기를 가리키는데, 그 손가락이 향한 곳이 자신인지 옆 사람인지를 두고 지금도 논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의 이 방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부릅니다. 배경을 검게 덮고 필요한 곳에만 강한 빛을 넣어 화면을 무대로 만드는 것이죠. 그의 삶도 화면만큼 거칠어서 1606년 로마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피하다 1610년에 숨졌습니다. 이 화법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위트레흐트와 나폴리와 세비야에 그 빛을 흉내 내는 무리가 생깁니다.
교회가 감동을 주문했습니다
왜 이런 연출이 필요했을까요.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마지막 회기에서 성상 교령을 확정합니다. 이미지를 없애자는 개신교 쪽 주장과 반대로, 이미지는 글 모르는 신자를 가르치고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죠. 미술에 감동이라는 임무가 부과된 셈입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성 테레사의 환희」(1647~1652,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가 그 극단입니다. 대리석으로 깎은 수녀가 뒤로 젖혀지고 천사가 화살을 겨누며, 위쪽 숨은 창의 햇빛이 금박 살대를 타고 내려옵니다. 양옆 벽에서는 후원자 가문 사람들이 관람석에 앉은 조각으로 이를 구경합니다. 같은 연출술은 곧 왕궁으로 갑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는 거울과 천장화와 정원 축선을 동원해 한 사람을 국가의 중심으로 보이게 만든 장치였죠. 바로크는 양식이기 이전에 설득의 기술이었습니다.
성당 대신 거실에 걸린 그림
북쪽 네덜란드는 사정이 정반대였습니다. 개신교 교회가 제단화를 걸지 않아 최대 발주처가 사라졌고, 무역으로 돈을 번 시민이 집 벽에 걸 그림을 샀습니다. 화가는 주문을 기다리는 대신 미리 그려 화상에게 넘겼고 풍경화와 정물화와 풍속화 시장이 섭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의 「야경」(1642,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원래 시민 민병대의 단체 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물을 나란히 세우는 대신 대원들이 막 움직이는 순간을 그렸고, 어떤 얼굴은 어둠에 반쯤 잠겼습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는 정반대로 조용합니다. 「우유 따르는 여인」(1660년경, 같은 미술관)에는 왼쪽 창에서 든 빛과 빵 껍질의 흰 점들과 항아리에서 떨어지는 가는 우유 줄기밖에 없습니다. 사건이 없는데도 눈을 뗄 수 없다는 것이 이 그림의 사건입니다.
교회 주문이 끊긴 자리를 시민이 채우는 일은 유럽만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에도의 히시카와 모로노부(1618~1694)는 유곽과 거리의 풍속을 목판화로 찍어 상인 계층에 팔았고, 우키요에 판화 시장이 여기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림의 주제를 바꾸는 것은 대개 취향이 아니라 값을 치르는 사람입니다.
200년 뒤에 다시 걸린 이름
이 시기 화가 목록에서 오래 빠져 있던 이름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년경)입니다. 그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년경, 우피치 미술관)는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과 다릅니다. 유디트는 겁먹고 고개를 돌리는 대신 소매를 걷고 팔에 체중을 실어 칼을 밀어 넣습니다. 하녀는 구경하는 대신 상대의 몸을 눌러 붙잡고 피는 침대보를 타고 뻗칩니다.
1612년 그의 아버지가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를 강간 혐의로 고소했는데, 정작 고문 기구를 견디며 증언해야 했던 쪽은 그 자신이었습니다. 1616년에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여성으로 처음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아버지 오라치오의 것으로 분류되었고 재평가는 20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집니다. 린다 노클린이 1971년에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라고 물으며 문제를 재능이 아니라 아카데미 입학과 인체 데생 접근권 같은 제도로 옮긴 것이 전환점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그림을 전부 재판의 복수로 읽는 데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를 전기 속에 다시 가두지 말고 화가로서의 구성 능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네에서 맹세로
18세기 프랑스로 가면 분위기가 가벼워집니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1767, 월리스 컬렉션)에는 분홍 드레스의 여인이 그네를 타며 신발 한 짝을 차 올리고, 덤불 아래 숨은 남자가 그 치마 속을 올려다봅니다. 파스텔 색조와 곡선과 사적인 유희가 로코코의 얼굴이죠.
그러다 취향이 뒤집힙니다. 1738년 헤르쿨라네움과 1748년 폼페이 발굴로 고대 유물이 쏟아졌고,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1755년 저작에서 그리스 미술의 미덕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요약했습니다.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루브르)가 새 취향의 선언이 됩니다. 왼쪽에는 세 형제가 팔을 뻗어 칼을 향하고 오른쪽에는 여인들이 무너져 앉았으며, 배경은 장식 없는 아치 세 개뿐입니다. 곡선이 직선으로, 유희가 의무로 바뀐 것입니다. 다비드는 혁명기에 국민공회 의원으로 국왕 처형에 찬성했고, 「마라의 죽음」(1793)에서 욕조 밖으로 늘어진 팔로 혁명의 순교자상을 만든 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렸습니다. 양식은 도덕을 담을 수 있지만, 어느 편의 도덕인지는 정치가 정합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아카데미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관람자를 설득하려고 만든 작품을 어떤 때는 선전이라 부르고 어떤 때는 걸작이라 부릅니다. 그 경계는 무엇이 정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