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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세계의 미술 2강. 여백이 말을 하는 그림

서양에서 그림 위의 글씨는 서명이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글씨가 그림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우키요에가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 준 충격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키요에는 윤곽선과 평평한 색면으로 화면을 만들고, 인물을 화면 가장자리에서 과감히 잘라 냅니다. 명암 계조와 소실점 원근을 당연한 전제로 여기던 유럽 화가들에게 이것은 다른 화면 문법의 실물 증거였습니다. 참고로 우키요에는 분업 생산물이라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닙니다.

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에 사는 것

북송의 화가 곽희가 남긴 화론 『임천고치』에는 산수화를 보는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벼슬에 매인 사람이 산에 갈 수 없으니 그림을 걸어 두고 그 안을 거닌다는 것이죠. 남조의 종병이 말한 와유(臥遊), 곧 누워서 노니는 감상법이 이 전통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중국 산수화의 화면은 창밖 풍경이 아닙니다. 범관의 「계산행려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화면 위쪽 삼분의 이를 거대한 바위산 덩어리가 통째로 차지하고, 그 아래 아주 작게 나귀를 몰고 가는 행상 몇이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작은지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곽희는 산을 보는 세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고원(高遠), 앞산 너머를 넘겨다보는 심원(深遠), 가까운 데서 먼 데로 펼쳐 보는 평원(平遠)입니다. 한 화면 안에서 시점을 바꿔 가며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장치죠.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와 물과 하늘로 읽히는 자리입니다.

글씨가 그림보다 높았던 이유

동아시아 예술의 위계는 서양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었습니다. 최고 자리에 서예가 있고, 그다음이 회화입니다. 붓과 먹과 종이라는 도구가 같고, 획을 긋는 순간 되돌릴 수 없다는 조건도 같기 때문에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 했습니다. 4세기 왕희지의 「난정서」는 원본이 전하지 않고 후대의 모사본만 남았는데도 천오백 년 동안 표준으로 군림했습니다.

소식(1037~1101)은 여기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뗍니다. 그는 형태가 닮았는지로 그림을 논하는 것은 아이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고 썼습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그린 사람의 정신이 드러난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문인화가 성립합니다. 그림 옆에 시를 써 넣고, 그 글씨가 다시 화면의 일부가 되고, 나중에 감상한 사람들이 도장을 찍어 화면에 층을 더합니다. 시서화 일치란 세 장르를 나란히 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화면에서 셋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정적이라는 오해

동아시아 회화가 수백 년 같은 그림을 반복했다는 인상은 사실과 다릅니다. 북송의 기념비적 산수는 남송에 오면 마원과 하규의 손에서 화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고 나머지가 텅 비어 버립니다. 원나라가 들어서자 벼슬길이 막힌 문인들이 붓을 듭니다. 예찬의 그림에는 빈 정자와 마른 나무 몇 그루만 있고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황공망의 「부춘산거도」(1350년경 완성)는 후대에 불에 타 두 조각으로 갈라졌고 지금도 서로 다른 곳에 있습니다.

명대에는 아예 계보 싸움이 벌어집니다. 동기창(1555~1636)은 회화의 역사를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 문인이 여기로 그린 계보를 정통에 놓고 직업 화가의 정교한 채색화를 아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분은 관찰의 결과라기보다 자기 진영을 정통으로 세우려는 역사 서술의 기획에 가까웠고, 오늘날 미술사에서는 그 편향 자체가 연구 대상입니다. 청대의 석도는 옛 법을 따르라는 요구에 나에게는 나의 법이 있다고 응수했습니다. 정적이기는커녕 매 세대가 앞 세대와 싸운 역사죠.

두루마리에서 인쇄물로

일본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 중국풍 그림과 구별되는 자기 양식을 야마토에(大和絵)라 불렀습니다. 12세기 「겐지 이야기 그림두루마리」를 보면 방식이 독특합니다. 지붕과 천장을 걷어 내고 비스듬히 내려다보게 그려 방 안을 보여 주는 후키누키야타이 기법을 쓰고, 얼굴은 가는 선 하나로 눈을, 갈고리 하나로 코를 표시하는 히키메카기바나로 처리합니다. 표정을 지우면 감정이 사라질 것 같지만, 오히려 자세와 옷의 배치가 감정을 떠맡습니다. 두루마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풀어 가며 보는 형식이라 시간이 공간으로 펼쳐집니다.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은 예술품이기 이전에 대량 인쇄 상품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공, 판목을 파는 조각공, 색을 얹어 찍는 인쇄공, 기획하고 자본을 대는 판원이 분업했습니다. 1765년경 다색 인쇄 기법이 자리 잡으면서 색이 여러 겹 올라간 그림이 쏟아졌고, 가부키 배우와 유곽의 여인과 명소가 주된 상품이었습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는 1830년대 초 「후가쿠 36경」 연작의 한 장입니다. 갈고리처럼 굽은 거대한 파도가 화면 왼쪽을 덮치고 배 세 척이 그 아래 삼켜지기 직전인데, 저 멀리 중앙에 후지산이 작고 고요하게 앉아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이 파도이고 가장 작은 것이 산이라는 이 뒤집힘이 화면의 사건입니다. 호쿠사이의 딸 가쓰시카 오이도 화가였습니다. 그는 밤의 유곽을 등불 빛과 어둠의 대비로 그린 육필화를 남겼습니다.

포장지에서 시작된 사건

19세기 중반 일본 물건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우키요에도 함께 건너갑니다. 판화가 도자기 포장지로 쓰여 파리에 도착했다는 일화가 자주 인용되는데, 세부는 확실치 않아도 값싼 인쇄물이었기에 그런 식으로도 흘러들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거치며 자포니슴이라 불리는 유행이 번집니다.

유럽 화가들이 가져간 것은 소재보다 화면 문법이었습니다. 명암으로 부피를 만들지 않는 평평한 색면, 대상을 화면 끝에서 태연히 잘라 내는 구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텅 빈 여백이었죠. 드가는 인물을 화면 가장자리에서 자르고, 반 고흐는 1887년 히로시게의 판화를 유화로 옮겨 그렸습니다. 다만 이 수용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유럽은 우키요에를 일본 미술의 정점으로 여겼지만, 정작 일본 내부에서 그것은 값싼 소비재에 가까웠습니다. 남의 나라 예술 가운데 무엇이 대표작인지를 소비 시장이 정해 버린 셈이죠. 3강에서는 이 문제가 이슬람 미술 서술에서 훨씬 더 크게 반복되는 장면을 봅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곽희가 정리한 고원, 심원, 평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고원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기, 심원은 앞산 너머를 넘겨다보기, 평원은 가까운 데서 먼 데로 펼쳐 보기입니다. 한 화면에서 시점을 바꿔 가며 감상자가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장치이며, 하나의 소실점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문제 2. 소식이 형태가 닮았는지로 그림을 논하는 것을 낮춰 본 취지는 무엇일까요?
소식의 발언은 문인화의 출발점이 됩니다. 잘 닮게 그리는 능력이 아니라 그린 사람의 인격과 정신이 드러나는지를 평가 기준으로 옮긴 것이죠. 그 결과 그림 옆의 시와 글씨가 화면의 일부로 함께 작동하게 됩니다.
문제 3. 본문이 동기창의 남북종론을 다루는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남북종론은 문인의 여기 그림을 정통에 놓고 직업 화가의 채색화를 아래에 두었습니다. 본문은 이를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계보를 만드는 기획으로 보고, 그 편향 자체가 오늘날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 4. 우키요에의 제작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키요에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공, 판목을 새기는 조각공, 색을 찍는 인쇄공, 기획과 자본을 맡은 판원이 분업했습니다. 이 대량 인쇄 구조 덕분에 값이 싸졌고, 그래서 유럽으로도 쉽게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한 문화의 대표작을 바깥의 시장이 골라 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해외에서 한국 문화의 대표로 꼽히는 것들은 누가 고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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