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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세계의 미술 4강. 피카소가 베낀 것들

20세기 유럽 미술이 새로워진 순간, 그 새로움의 재료는 대부분 약탈된 배에 실려 왔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나이지리아 이페의 청동 두상을 두고 일부 유럽 학자가 외부 기원설을 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페 두상은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요루바 장인들이 실랍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데 1910년 이것을 손에 넣은 프로베니우스는 아틀란티스의 흔적이라 했고, 지중해 기원설도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근거가 아니라 전제가 문제였고, 이후 연구로 현지 제작이라는 사실이 확립됐습니다.

잃어버린 밀랍이 만든 얼굴들

먼저 말로 그려 보겠습니다. 이페 두상은 실물 크기의 사람 얼굴입니다. 광대와 입술과 눈꺼풀의 굴곡이 살아 있는 사람을 본 듯 정확하고, 얼굴 전체에 가는 세로줄이 촘촘히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두상을 1910년 나이지리아 이페에서 처음 손에 넣은 독일 인류학자 레오 프로베니우스는 그것을 가라앉은 대륙 아틀란티스의 흔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38년 왕궁 터에서 청동 두상이 무더기로 나온 뒤에도 외부 기원설은 한동안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작품이 아니라 제작자의 출신을 의심한 것이죠. 지금은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요루바 장인들의 작업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베냉 왕국의 청동판도 마찬가지입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지금의 나이지리아 에도 지역에서 만들어져 왕궁 기둥에 걸렸고, 왕과 전사와 사절을 기록했습니다. 청동이라 부르지만 성분상 황동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밀랍으로 형태를 만들고 흙을 씌운 뒤 밀랍을 녹여 낸 자리에 쇳물을 붓는 실랍법으로, 얇고 세부가 살아 있는 부조를 대량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자 기록 대신 금속판이 왕조의 역사를 떠맡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 판들은 왜 지금 런던과 베를린에 있을까요. 1897년 영국의 징벌 원정대가 베냉시티를 점령하고 왕궁의 금속 공예품 수천 점을 실어 갔기 때문입니다. 이 유물들이 유럽 시장에 풀리면서 아프리카 조각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됐습니다.

1907년 트로카데로의 오후

파리의 민족지 박물관에 들른 피카소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가면들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그해 완성한 「아비뇽의 처녀들」의 오른쪽 두 인물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입니다. 화면 왼쪽은 그래도 사람 얼굴인데, 오른쪽 두 얼굴은 코가 옆으로 꺾이고 눈이 어긋나며 표면이 빗금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마티스와 블라맹크와 브라크도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조각을 모았습니다. 인체를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증을 그들은 다른 대륙에서 받아 온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건에 붙은 이름입니다. 유럽은 그것을 원시주의(primitivism)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아프리카 조각을 문명 이전의 산물, 곧 본능적이고 역사가 없는 것으로 배치합니다.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 가면들은 특정 왕국의 의례를 위해 정교한 규범에 따라 만들어졌고, 작가가 알려진 경우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요루바의 조각가 올로웨 오브 이세는 당대에 이름난 장인이었습니다. 1984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대규모 전시가 이 문제를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유럽 작품에는 작가와 연도가 붙고 아프리카 작품에는 그것이 없는 채로, 형태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란히 걸렸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의 반박이 쏟아졌고 논쟁은 지금도 인용됩니다.

태워 없앤 도서관

아메리카로 건너가 봅시다. 마야는 문자를 가진 문명이었습니다. 팔렌케 파칼 왕의 석관 뚜껑에는 왕이 세계수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 빽빽한 문자와 함께 새겨져 있고, 보남팍 벽화에는 전투와 포로와 의례가 강렬한 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마야가 남긴 접책 코덱스는 지금 네 점만 전합니다. 1562년 유카탄에서 선교사 디에고 데 란다가 마야의 책들을 우상 숭배의 도구로 몰아 불태운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인물이 남긴 기록이 훗날 문자 해독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마야 문자 해독은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진전됐고, 그전까지 마야는 문자 없는 신비한 천문 민족처럼 소개됐습니다.

아즈텍의 조형은 규모로 압도합니다. 1790년 멕시코시티 중앙 광장 공사 중에 지름 3미터가 넘는 원형 석판이 나왔습니다. 흔히 태양의 돌이라 부르는데, 중앙의 얼굴을 네 개의 사각 구획과 날짜 기호가 동심원으로 둘러쌉니다. 달력이라 불리지만 무엇을 위한 물건이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잉카는 또 다릅니다. 문자 대신 끈의 매듭으로 기록하는 키푸를 썼고, 조형의 정점은 조각이 아니라 직물과 석축이었습니다. 나라가 각지에서 뽑아 모은 여성 직조공들이 왕실이 쓸 고급 직물을 짰습니다. 마추픽추와 쿠스코의 벽은 모르타르 없이 다각형 돌을 깎아 맞춰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습니다. 잉카의 금세공품 대부분은 정복 이후 녹아 금괴가 됐습니다. 남아 있지 않은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유리장이 만드는 오해

지금 이 작품들을 만나는 장소는 대개 박물관인데, 진열 방식이 해석을 미리 정해 버립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유물은 오랫동안 미술관이 아니라 민족학박물관에 놓였습니다. 한쪽 건물의 물건은 예술이 되고 다른 쪽은 자료가 되는 것이죠.

가면을 예로 들면 분명해집니다. 유리장 안의 가면은 정지한 얼굴 조각입니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옷과 함께 입고 북소리에 맞춰 움직이며 특정한 날에만 나타나는 사건의 일부였습니다. 움직임과 소리와 때를 걷어 내고 얼굴만 남긴 뒤 조명을 비추면, 우리는 그것을 조각으로 감상하면서 그 물건이 하던 일은 보지 못합니다. 제작자 이름 대신 부족 이름만 적는 관행도 같은 방향입니다. 이름을 지우면 개인의 솜씨는 사라지고 집단의 습속만 남습니다.

소장처 문제는 그래서 예의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2018년 프랑스 정부 의뢰로 나온 보고서가 식민기에 반출된 아프리카 문화재의 반환을 권고했고, 이후 독일과 여러 기관이 베냉 유물 일부를 나이지리아로 돌려보냈습니다. 반대 논리도 있습니다. 보편 박물관이 인류의 유산을 한자리에서 비교해 준다는 주장이죠. 다만 그 비교의 문법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묻는 순간, 논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 질문을 들고 다음 과목으로 넘어갑니다. 눈으로 보던 것을 이제 귀로 듣게 됩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베냉 왕국의 금속 부조판을 만든 기법과 그 기능으로 옳은 것은 무엇일까요?
실랍법은 밀랍 원형에 흙을 씌우고 밀랍을 녹여 낸 자리에 쇳물을 붓는 방식입니다. 얇고 세밀한 부조를 만들 수 있었고, 이 판들은 왕궁 기둥에 걸려 왕과 전사와 사절을 기록하는 역사 매체 역할을 했습니다.
문제 2. 본문이 원시주의라는 명명을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시주의라는 말은 대상을 문명 이전 단계에 배치합니다. 그러나 그 가면들은 특정 왕국의 의례를 위해 규범에 따라 만들어졌고 이름이 알려진 장인도 있었습니다. 1984년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의 배치 방식이 이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문제 3. 마야 코덱스가 현재 네 점만 남은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카탄에서 벌어진 소각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마야는 접책 형태의 책을 만들던 문자 문명이었으나 지금은 네 점만 전합니다. 문자 해독이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진전되면서 마야를 문자 없는 신비한 문명으로 소개하던 관행도 오래 지속됐습니다.
문제 4. 본문이 박물관 진열을 해석의 문제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가면은 옷과 북소리와 특정한 때가 함께 작동하던 사건의 일부였습니다. 유리장은 그것을 정지한 얼굴로 바꾸고, 제작자 대신 부족 이름만 적는 관행은 개인의 솜씨를 지웁니다. 그래서 소장처 논쟁은 예의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가 됩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원래 쓰이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물건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돌려주는 것과 함께 보는 것 사이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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