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세계의 미술 1강. 고구려 무덤에서 김홍도까지
한국 미술사는 소박함의 역사가 아닙니다. 무엇을 그리지 않을지 매번 다시 결정한 역사입니다.
풀고 시작
무덤 속에 남은 5세기의 일상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가장 많은 그림은 산 사람이 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무덤 벽이죠. 황해도 안악 3호분에는 357년이라는 연대가 적힌 묵서가 남아 있고, 평안남도 덕흥리 고분에는 408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연도가 박힌 그림이 천육백 년을 버틴 셈입니다.
무용총 「수렵도」를 말로 그려 보겠습니다. 화면 오른쪽에서 말이 달려 나가는데, 탄 사람이 상체를 뒤로 완전히 비틀어 활시위를 당깁니다. 뒤쫓기는 사슴은 화면 왼쪽 위로 달아나고, 산은 진짜 산이라기보다 물결 무늬를 겹쳐 놓은 기호처럼 도식화돼 있습니다. 사람과 말이 산보다 크다는 점부터 이미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닙니다. 같은 무덤의 「접객도」로 옮겨 가면 규칙이 더 분명해집니다. 무덤 주인이 크게 앉아 있고 그 앞의 시종은 사분의 일 크기로 줄어듭니다. 크기가 거리가 아니라 지위를 표시하는 자로 쓰인 것이죠. 6세기 이후 강서대묘로 가면 생활 장면이 사라지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만 남습니다. 무덤이 죽은 이의 집을 재현하던 단계에서 우주의 방위를 지키는 상징 공간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돌을 깎아 만든 침묵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자연 동굴이 아닙니다. 화강암을 다듬어 쌓아 올린 인공 석굴이고,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조성이 시작됐다고 전합니다. 네모난 전실을 지나 좁은 통로를 통과하면 갑자기 원형 주실이 열리고, 그 중앙에 본존불이 결가부좌로 앉아 있습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이고, 벽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과 제자상들이 낮은 부조로 둘러섭니다. 좁은 길 뒤에 둥근 방을 배치한 이 동선 자체가 조형의 일부입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정반대 방향의 조형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두 점 가운데 삼산관을 쓴 상은 7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봅니다. 오른 다리를 왼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아주 살짝 댑니다. 손가락이 뺨을 누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힘이 실리는 순간 생각이 멈추기 때문이죠. 이 자세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상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제작지와 전래 경로를 둘러싼 논쟁이 오래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색과 순백 사이
고려청자의 색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 불렀습니다. 1123년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그 말을 적어 두었습니다. 12세기가 되면 고려 도공들은 그릇 표면을 파내고 다른 색 흙을 메워 무늬를 넣는 상감기법을 씁니다. 학이 구름 사이로 날아오르고 버들가지가 늘어지는데, 그것이 유약 아래 잠겨 있어 손으로 만지면 아무 요철이 없습니다.
조선백자, 특히 18세기의 달항아리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무늬가 거의 없고, 색은 푸른 기가 도는 흰색이며, 형태는 좌우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습니다. 큰 항아리를 한 번에 물레로 올릴 수 없어 위아래 두 덩이를 따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허리 부분에 접합선이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어긋남을 무기교의 미로 읽는 오래된 해석이 있고, 반대로 기술적 제약과 절제된 관요 취향의 결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 하나가 정답은 아닙니다.
산이 실물이 되고 사람이 주인공이 되다
정선으로 가기 전에 두 세기 앞을 잠깐 들르겠습니다. 16세기의 신사임당(1504~1551)은 포도와 풀벌레를 잘 그린 화가로 당대에 이미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것으로 전하는 「초충도」를 보면 수박을 파먹는 들쥐와 가지 곁의 방아깨비가 손바닥만 한 화면에 또렷이 들어앉아 있고, 배경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름이 남은 조선 화가가 남성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는 1751년 작품입니다. 비가 갠 직후의 인왕산인데, 바위 덩어리를 먹으로 몇 번이고 겹쳐 칠해 시커멓고 무겁게 만들어 놓고, 아래쪽에는 물안개를 희게 비워 두었습니다. 젖은 바위가 정말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가 그린 산은 중국 화보에 실린 이상적인 산이 아니라 그가 오르내린 조선의 산이었습니다.
한 세대 뒤 김홍도(1745~1806 이후)와 신윤복(1758~?)은 아예 산을 치웁니다. 『단원풍속도첩』의 「씨름」은 배경을 완전히 비운 채 구경꾼들을 둥글게 배치하고, 한가운데 두 사람이 맞붙어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엿장수는 시합이 아니라 딴 데를 봅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은 다릅니다. 색을 진하게 쓰고, 그네 타는 여인과 물가에서 몸을 씻는 여인들, 그리고 바위 뒤에서 훔쳐보는 두 사람까지 한 화면에 넣습니다. 김홍도가 노동을 보고 신윤복이 욕망을 봤다는 대비가 자주 쓰이지만, 두 사람 모두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점은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화를 낮춰 본 습관
책가도, 화조도, 문자도, 십장생도 같은 그림들은 오랫동안 아류로 취급됐습니다. 이름 없는 화공이 그렸고 원근이 어긋나며 같은 도상이 반복된다는 이유였죠. 그런데 이 전제 자체가 흔들립니다. 책과 문방구를 층층이 쌓아 그린 책가도는 정조 시대 궁중에서도 그려졌고, 민간의 그림과 궁중의 그림은 도상을 주고받았습니다. 위와 아래가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 것이죠.
민화라는 이름 자체도 20세기에 붙은 근대적 명명입니다. 일본 민예운동의 어휘가 한국 회화에 적용되면서 정착했고, 이후 조자용 같은 연구자들이 수집과 재평가에 나섰습니다. 책가도에서 책장의 앞뒷면이 동시에 보이는 것은 원근을 몰라서라기보다, 소유한 물건을 빠짐없이 보여 주려는 다른 목적에 화면을 맞춘 결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규칙을 못 지킨 그림과 다른 규칙을 따른 그림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2강에서는 이 다른 규칙이 중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달항아리의 어긋난 형태를 두고 의도된 미감이라 부를 때와 기술적 제약이라 부를 때, 우리는 각각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요.
이전: 서양 미술사 4강 · 다음: 동아시아와 세계의 미술 2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