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3강. 살롱에서 쫓겨난 그림들
지금 달력과 우산과 머그컵을 덮고 있는 그 그림들은, 처음 걸렸을 때 관람객이 지팡이로 찌르려 했던 물건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심사위원 몇 사람이 한 나라의 그림을 정하던 시절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화가로 먹고살 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관전인 살롱에 입선하는 것이었죠. 심사는 에콜 데 보자르 중심의 아카데미 인맥이 맡았고 서열도 분명했습니다.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큰 화면이 가장 위였고 초상과 풍경과 정물이 아래였으며, 붓 자국은 보이지 않게 지워야 했습니다.
1863년 심사에서 출품작의 절반 넘게 떨어지자 항의가 커졌고, 나폴레옹 3세는 낙선작을 따로 걸어 대중이 판단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것이 낙선전(Salon des Refusés)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가장 몰려든 그림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 오르세 미술관)였습니다. 숲속 풀밭에 정장 차림 남자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 옆에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여신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옷을 벗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몸에는 부드러운 음영 대신 넓은 밝은 면이 붙어 종이를 오린 것처럼 납작했죠. 쏟아진 조롱은 곧 명성이 되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완성
1874년 4월, 사진가 나다르의 작업실을 빌린 화가 서른 명이 심사 없는 전시를 엽니다. 여기 걸린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를 보면 안개 낀 항구에 주황색 해가 떠 있고, 물 위 반사는 짧은 붓질 몇 개로 찍혀 있으며, 배경의 기중기와 굴뚝은 회색 얼룩에 가깝습니다. 루이 르루아는 벽지 초벌 그림이 이보다 완성도가 높겠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 미완성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사물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특정 시각의 빛 속에서 어떻게 보이는가에 있었으니까요. 모네는 나중에 루앙 대성당 정면을 시간대별로 서른 점 넘게 그렸는데, 같은 돌덩어리가 새벽에 푸르고 정오에 희며 저녁에 주황으로 물듭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성당이 아니라 그 위를 지나는 빛이었습니다.
도시를 그린 사람들
소재도 낯설었습니다. 신화 대신 기차역과 카페와 무도회장과 세탁부의 팔이 화면에 올라왔죠. 에드가 드가는 발레 연습실을 반복해 그렸는데, 「압생트」(1876년경,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두 인물을 화면 오른쪽으로 밀어붙이고 왼쪽 앞을 빈 탁자로 채웠습니다. 사람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리는 구도는 사진과 일본 판화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여성 화가 두 사람도 이 그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베르트 모리조(1841~1895)는 여덟 번의 그룹전 중 일곱 번에 참여했고, 「요람」(1872, 오르세)에서 아기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얼굴에 피로와 애정을 함께 담았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메리 카사트(1844~1926)는 어머니와 아이를 되풀이해 다뤘는데, 감상적인 모자상과 달리 아이를 씻기느라 몸이 기울고 팔에 힘이 들어간 자세를 택했습니다. 두 사람이 술집과 무도회장 대신 실내와 정원을 그린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여성이 혼자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파리에 닿았습니다
1854년 일본 개항 이후 우키요에 목판화가 유럽에 대량 흘러들었고, 1872년 비평가 필리프 뷔르티가 이 열광에 자포니슴(Japonisme)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0~1832년경)를 봅시다. 갈고리처럼 휜 파도가 화면 왼쪽을 통째로 차지하고, 그 아래 배 세 척이 파묻히기 직전이며, 후지산은 파도 골 사이에 작게 놓여 있습니다. 그림자가 없고 색은 평평한 면으로 나뉘며, 화면 앞의 것이 뒤를 거리낌 없이 가립니다.
서구 화가들이 여기서 가져간 것은 이국의 소품이 아니라 화면을 짜는 다른 문법이었습니다. 대담한 잘라내기, 높은 시점, 사선 구도, 아무것도 없는 여백이죠.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명소 에도 백경』(1856~1858)을 반 고흐가 유화로 옮겨 그린 습작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우키요에는 일본에서 배우와 유곽과 여행지를 다룬 대중 상업 판화였습니다. 그것을 순수한 동양의 미학으로 재배치한 것은 파리 쪽 시선이었고, 이 각색 자체가 당시 유럽이 아시아를 보던 방식의 일부였습니다.
세 갈래로 갈라진 뒤
1880년대가 되면 인상주의 안에서 불만이 자랍니다. 빛의 인상만 좇다 보니 구조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죠. 갈라진 세 방향을 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1910년 런던 전시에서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 묶는데, 당사자들이 쓴 적 없는 사후의 이름입니다.
폴 세잔(1839~1906)은 구조로 갔습니다. 그의 정물에서 탁자 앞면과 사과들은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이어서, 여러 번 본 것을 한 화면에 쌓은 상태가 됩니다. 반 고흐(1853~1890)는 감정으로 갔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1889,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하늘은 소용돌이치고 별은 물감 덩어리로 부풀며 사이프러스는 검은 불꽃처럼 솟습니다. 그가 1888년 아를에서 자기 귀를 훼손한 사건은 널리 알려졌지만, 귀 전체인지 일부인지 경위가 어떠했는지는 지금도 정설이 갈립니다. 폴 고갱(1848~1903)은 상징으로 갔습니다. 타히티에서 그린 강렬한 색면은 미술사를 바꿨지만, 그 여행이 프랑스 식민 통치의 항로를 따라갔고 현지 여성들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함께 말해야 합니다.
살롱에서 쫓겨나 벽지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던 그림들은 오늘날 특별전 티켓이 가장 빨리 매진되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스캔들이 취향의 기본값이 되기까지 백 년이 걸린 셈이죠. 어떤 미술이 안전해 보인다면, 그것이 처음부터 안전했는지 아니면 우리 눈이 그쪽으로 이사한 것인지 물어볼 만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한때 충격이었던 그림이 지금은 편안해 보인다면, 달라진 것은 그림일까요 우리일까요. 오늘 우리가 불편해하는 이미지 가운데 백 년 뒤 달력에 실릴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