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보는 법 2강. 물감 튜브가 없었다면 인상주의도 없었습니다
화가가 무엇을 그릴지 정하기 전에, 손에 쥔 재료가 이미 그릴 수 있는 것의 목록을 좁혀 놓았습니다.
풀고 시작
유화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닙니다
미술사 교과서에는 오랫동안 얀 반 에이크가 유화를 발명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가 16세기에 그렇게 써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8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의 7세기 벽화에서 기름을 매재로 쓴 층이 확인되면서 이 이야기는 정정되었습니다. 반 에이크가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습니다. 통설이 오래 버틴 이유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의 화면이 앞선 어떤 그림과도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죠. 달걀노른자로 안료를 개는 템페라는 금방 말라서 붓 자국을 부드럽게 잇기가 어렵고, 색을 겹쳐 깊이를 만들기도 힘듭니다. 반면 기름은 천천히 마릅니다. 화가는 얇고 투명한 층을 몇 번이고 덧입힐 수 있게 되었죠.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여인의 초록 드레스가 안쪽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고 천장에 걸린 놋쇠 샹들리에가 창빛을 받아 금속처럼 번뜩이는 것은 이 여러 겹 덕분입니다. 그 샹들리에에는 초가 딱 하나만 켜져 있죠. 뒤쪽 벽에는 볼록거울이 걸려 있는데 나무 테두리를 따라 손톱만 한 원형 장면이 열 개 빙 둘러 그려져 있고, 그 옆에 묵주 한 줄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세부는 붓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고 다시 손을 댈 수 있어야 나옵니다. 재료가 느리게 마른다는 성질 하나가 그림의 밀도를 통째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벽화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정반대의 재료도 있습니다. 프레스코는 갓 바른 젖은 회벽에 안료를 물에 개어 칠하는 기법입니다. 회벽이 마르면서 안료가 벽 자체와 하나로 굳기 때문에 색은 몇백 년을 갑니다. 대신 하루에 칠할 수 있는 면적만큼만 회를 발라야 하고, 마르기 시작하면 손을 뗄 수밖에 없습니다. 고쳐 그리려면 그 부분을 쪼아 내고 다시 발라야 하죠. 이렇게 하루치로 나뉜 구획을 조르나타(giornata)라고 부르는데, 벽화 표면을 비스듬히 들여다보면 그 이음매가 지금도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매일 아침 그날 끝낼 분량을 미리 확정한 채 비계에 올랐습니다. 프레스코가 웅장하고 단순한 형태로 기우는 것은 화가의 성격 탓이 아니라 머뭇거림을 허락하지 않는 재료의 성질 때문입니다.
먹은 지우개가 없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필묵은 또 다른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종이나 비단은 먹을 순식간에 빨아들이고 덧칠은 그대로 얼룩이 됩니다. 그래서 화가는 붓을 대기 전에 이미 그림을 끝내 놓아야 하고, 화면의 빈 곳은 미완성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적극적인 요소가 됩니다. 먹물을 흥건히 흘려 번지게 하는 발묵(潑墨)은 이 통제 불가능성을 오히려 표현으로 뒤집은 방법입니다. 남송의 승려 화가 목계의 「육시도」(六柿圖, 13세기, 교토 다이토쿠지)를 보면 감 여섯 개가 한 줄로 놓여 있는데, 어떤 것은 거의 검고 어떤 것은 윤곽선만 남아 있으며 배경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의 농담 차이 하나로 여섯 개의 무게가 전부 달라지죠. 조선에서도 같은 재료가 또 다른 결과를 냈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는 왼쪽 아래 나지막한 현실의 산에서 출발해 오른쪽 위 기암괴석 사이 복사꽃 핀 도원으로 이어집니다. 두루마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 보던 관례를 뒤집어 놓은 배치죠. 안평대군이 꾼 꿈을 사흘 만에 그려 냈다고 발문에 적혀 있는데, 그런 속도가 가능했던 것도 겹쳐 쌓지 않는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유화가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리는 예술이라면 수묵은 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획을 거는 예술입니다.
그렇다면 재료가 전부일까요
이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네는 1890년부터 이듬해까지 같은 건초더미를 계절과 시간대를 바꿔 가며 스무 점 넘게 그렸습니다. 해가 옮겨 가는 동안 캔버스를 갈아 가며 작업하려면 물감이 들판에 함께 나와 있어야 했죠. 1841년 존 고프 랜드가 금속 튜브 특허를 내기 전처럼 돼지 방광에 물감을 담아 다녔다면 애초에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장 르누아르는 아버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세잔도 모네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물감을 들고 들판에 나간 사람이 남성 화가만은 아니었습니다. 베르트 모리조는 1874년 첫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화가였고 이후 여덟 번의 전시 가운데 한 번만 빼고 모두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네가 밝은 색과 야외 작업으로 옮겨 간 데에는 모리조의 권유가 있었다는 평가도 따라붙습니다. 다만 여기서 멈추면 곤란합니다. 같은 시기에 철도가 놓여 화가들이 파리 근교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일본 목판화의 대담한 구도가 유입되었으며, 사진이 기록의 임무를 가져갔고, 살롱 심사에서 밀려난 화가들이 독자 전시를 열었습니다. 재료는 가능성의 문을 열지만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갈지는 결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튜브 물감을 쓴 아카데미 화가들은 끝까지 화실에 남아 신화 속 인물을 그렸으니까요. 다음 강에서는 재료보다 더 오래 미술을 지배한 약속, 원근법을 다루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디지털 도구는 무한한 되돌리기를 허용합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제약이 사라진 자리에서 무엇이 함께 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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