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1강. 사람을 신만큼 크게 그리기로 한 순간
인물의 크기를 거룩함의 순서가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정하기 시작했을 때, 세계관 하나가 통째로 교체되었습니다.
풀고 시작
금박 하늘에는 발 디딜 바닥이 없었습니다
13세기 성당의 제단화를 떠올려 봅시다. 배경은 온통 금박인데, 하늘도 땅도 아니라 빛 자체를 뜻하는 평면입니다. 성모는 화면 한가운데 정면을 향해 앉아 있고, 무릎의 아기는 작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양옆 천사들은 성모보다 뚜렷이 작은데,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덜 거룩해서 작습니다. 발밑에는 딛고 설 바닥이 없어 인물이 금빛 위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1305년 무렵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의 「애도」에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둘러싼 인물 가운데 몇이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습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사람을 맨 앞줄에 놓다니, 도표라면 있을 수 없는 낭비입니다. 그런데 그 등이 우리를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옷은 몸의 부피를 따라 접히고 바위 언덕은 사선으로 시선을 끌며, 슬픔은 표정만이 아니라 웅크린 자세 전체에서 나옵니다. 성인이 도표에서 내려와 무게를 가진 몸이 된 것이죠.
벽에 구멍을 뚫는 기술
한 세기 뒤 피렌체에서 이 변화가 계산 가능한 규칙이 됩니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1410년대에 세례당을 그린 작은 판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거울에 비친 그림을 들여다보게 하는 실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이 나옵니다. 화면 안에 소실점을 하나 찍고 깊이로 들어가는 모든 선을 그리로 모으는 방식이죠.
효과는 마사초(Masaccio)의 「성 삼위일체」(1427년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확인됩니다. 평평한 벽에 격자 천장의 예배당이 실제로 파여 들어간 것처럼 보이죠. 그 아래 해골 위에는 나도 한때 그대와 같았고 그대도 나처럼 되리라는 명문이 붙어 있습니다. 1435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회화론』에서 그림을 열린 창에 비유하며 이 방법을 정리했습니다. 그림이 표면이기를 그만두고 창문인 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행가가 천국을 사는 방법
이런 실험에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피렌체는 양모와 환전으로 부를 쌓은 도시였고 그 정점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교황청 자금을 굴린 유럽 최대 은행가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이자를 받는 일이 죄로 여겨지던 시대를 살았고, 그가 산 마르코 수도원 재건에 거액을 쏟은 데는 신앙과 회계가 함께 작동했습니다.
당시 화가는 천재가 아니라 길드 소속 장인이었고 작업은 계약서로 시작했습니다. 계약서에는 청금석에서 뽑는 울트라마린을 어느 등급으로 쓸지, 금박을 몇 그램 올릴지가 적혔습니다. 우리가 오늘 감탄하는 화면의 상당 부분은 후원자가 지불한 재료의 목록이기도 합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밀어붙였습니다
전성기의 세 이름은 흔히 묶이지만 목표가 달랐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윤곽선을 지우는 쪽으로 갔습니다. 「최후의 만찬」(1495~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은 배신자가 누구냐는 말이 떨어진 직후의 몇 초를 붙잡아 열두 사도를 세 사람씩 네 무리로 묶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몸으로 갔습니다. 「다비드」(1501~1504,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는 4미터가 넘는 대리석인데, 돌을 던진 뒤가 아니라 던지기 직전입니다. 목의 힘줄과 오른손 혈관이 팽팽하고 눈은 아직 오지 않은 적을 봅니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는 정리로 갔습니다. 「아테네 학당」(1509~1511, 바티칸 서명의 방)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을 위로 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폅니다. 철학의 두 방향이 손동작 하나로 요약되고, 인물 수십 명이 소실점을 중심으로 배열됩니다.
북쪽의 다른 해법과, 뒤늦게 붙은 이름
알프스 북쪽은 다른 길을 갔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남녀가 손을 맞잡고 서 있고, 뒤편 볼록 거울에 방 전체와 문간에 선 두 사람이 담겨 있습니다. 샹들리에에는 대낮인데 초 하나만 켜져 있고, 발치에는 작은 개와 벗어 놓은 나막신이 있으며, 거울 위에는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1434라는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이탈리아가 기하학과 인체 비례라는 체계로 현실을 세웠다면, 북유럽은 유화의 얇은 층을 겹쳐 털과 놋쇠와 유리의 질감을 쌓는 관찰로 세웠습니다. 어느 쪽이 더 사실적이냐는 정할 수 없고 문법이 달랐을 뿐입니다. 같은 15세기에 조선의 안견은 「몽유도원도」(1447)에서 소실점 대신 시점을 여러 번 옮겨 가며 꿈속 산수를 두루마리에 펼쳤습니다. 원근법은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유럽이 고른 한 가지 규약이었습니다.
의심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자기가 르네상스에 산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조르조 바사리가 16세기에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썼고, 쥘 미슐레가 1855년에 르네상스를 시대의 이름으로 밀어 올렸으며,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서 근대적 개인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선언했습니다. 반론도 곧 따라붙었습니다. 찰스 호머 해스킨스는 『12세기 르네상스』(1927)에서 부활이 중세 안에 이미 여러 번 있었다고 했고, 조앤 켈리는 1977년 논문에서 여성에게도 르네상스가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포니스바 안귀솔라(1532년경~1625)처럼 궁정에서 이름을 얻은 여성 화가도 있었지만, 여성은 누드 데생 수업에서 배제되어 가장 높은 장르인 역사화에 발을 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한 시대의 이름은 그 시대가 아니라 그 시대를 필요로 한 후대가 붙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기에 후대가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 부를까요. 그리고 그 이름은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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