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4강.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인 미술
미술이 어려워진 것은 관람자가 게을러졌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놓인 자리가 눈에서 머리로 옮겨 갔기 때문입니다.
풀고 시작
알아볼 것이 하나도 없는 그림
1913년의 「구성 7」 앞에 서면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청색과 노랑과 검정 덩어리가 화면 중앙에서 소용돌이치고 굵은 선들이 그 위를 가로지르는데,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1)에서 그 이유를 음악에 기대 설명했습니다. 음악은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고 사람을 흔드는데 그림만 왜 대상을 닮아야 하느냐는 것이죠. 색과 형태가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른다면 대상은 방해물입니다.
칸딘스키를 최초의 추상화가로 적어 온 것은 정정이 필요합니다. 스웨덴의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이미 1906년부터 비구상 회화를 그렸지만, 사후 20년간 공개하지 말라는 뜻을 남긴 탓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이후입니다. 최초라는 표찰은 그린 순서가 아니라 알려진 순서를 따라 붙습니다.
나무에서 격자까지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이 간 길은 정반대로 차갑습니다. 1908년부터 1913년 사이 나무 그림을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과정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붉은 나무의 가지가 구불구불 뻗고, 다음에는 그 가지가 회색 곡선의 격자가 되며, 끝에는 곡선마저 짧은 수평 수직 조각으로 부서집니다.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그것을 지탱하던 뼈대가 남습니다.
1917년 창간된 잡지 『데 스테일』(De Stijl)에서 이 생각은 신조형주의 강령이 됩니다. 대각선을 배제하고 검은 선으로 화면을 나눈 뒤 빨강과 파랑과 노랑과 흰색만 채웁니다. 이것이 장식이 아니라 주장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몬드리안은 조화로운 화면이 조화로운 사회의 예고편이라고 믿었습니다. 뉴욕에서 그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에서는 검은 선마저 색 조각으로 부서져 깜빡입니다.
소변기가 전시장에 도착한 날
전쟁을 겪은 쪽에서는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1916년 취리히 카바레 볼테르에 모인 이들은 이성과 진보라는 말이 참호를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뜻 없는 소리 시를 낭독하고 우연으로 시를 짓는 다다(Dada)가 시작됩니다.
1917년 뉴욕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은 공장제 소변기를 뒤집어 R. 머트라는 가명으로 서명하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독립예술가협회 전시에 냈습니다. 심사 없이 모두 전시한다던 협회는 이것을 걸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던져졌죠. 손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은 물건이 작가가 골랐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되는가. 원본은 사라졌고 미술관에 있는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승인된 복제품이며, 실제로 보낸 사람을 두고도 논쟁이 있습니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은 방향을 무의식으로 돌립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시계 세 개가 치즈처럼 늘어져 나뭇가지와 탁자와 살덩이 위에 걸쳐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은 파이프를 정성껏 그려 놓고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파이프의 그림이니까요.
물감을 흘리자 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2차 대전으로 유럽 미술가들이 미국으로 피신하며 무게중심이 뉴욕으로 옮겨 갑니다. 잭슨 폴록(1912~1956)은 1947년부터 캔버스를 바닥에 펼치고 그 위를 걸으며 물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붓이 화면에 닿지 않으니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몸의 궤적이죠. 마크 로스코는 반대로 거대한 색면 두세 개로 관람자의 시야를 색으로만 채웠고, 리 크래스너는 뒤늦게야 이 그룹의 화가로 다시 놓였습니다.
여기에 냉전이 겹칩니다. 미국 쪽 기관들이 문화 사업으로 추상표현주의 순회전을 간접 지원했다는 것은 여러 자료로 확인됩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표현이라는 이미지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설 자산이었기 때문이죠. 다만 그 지원이 이 양식을 만들었다고까지 하면 지나칩니다. 화가들 대부분은 그 활용을 알지 못했으니까요. 미술이 정치에 이용되었다는 사실과 미술이 정치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수프 통조림에서 아이디어로
1962년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 서른두 점을 한 줄로 걸었습니다. 회사가 팔던 맛의 가짓수입니다. 서른두 점 모두 손으로 그렸는데도 붓 자국을 지워 인쇄물처럼 보이게 했고, 곧 실크스크린으로 넘어가 작업실을 공장이라 부르며 제작을 조수에게 맡겼습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한 컷을 확대하며 인쇄용 망점까지 손으로 찍어 냈습니다. 팝아트는 고급과 저급의 담을 허문 해방으로도, 소비사회에 대한 항복으로도 읽히며 두 독법이 나란히 살아 있습니다. 뉴욕에서 활동한 구사마 야요이는 물방울무늬를 벽과 바닥과 사람 몸까지 번지게 하고 거울 방으로 무한히 되풀이해, 대중문화와 개인의 강박이 갈라지지 않는 길을 열었습니다.
조지프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1965, 뉴욕 현대미술관)는 실제 접이식 의자와 그것을 찍은 실물 크기 사진과 사전의 의자 항목을 확대 복사한 종이를 나란히 붙인 것입니다. 셋 중 어느 것이 의자인가라는 질문이 곧 작품이죠. 솔 르윗은 1967년 글에서 아이디어가 예술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썼습니다. 작품이 물건에서 발상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러니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반응은 게으름이 아니라 정확한 관찰입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만으로 완결되던 시절이 끝났고, 많은 작품은 앞선 작품과의 대화 속에서만 뜻이 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기로 볼지 규칙이 다른 게임으로 볼지는 열려 있고, 제도와 시장이 가치를 만든다는 비판도 유효합니다. 물러서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답이 시시하든 통쾌하든 판단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어떤 작품이 설명을 읽어야만 성립한다면 그 설명은 작품의 일부일까요, 아니면 작품이 실패했다는 증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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