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의 원리 3강. 화학평형: 반응은 끝나지 않는다
겉보기에 멈춘 반응의 내부에서는 정방향과 역방향이 같은 속도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평형은 정지가 아니라 팽팽한 균형입니다.
풀고 시작
가역 반응과 동적 평형
1강의 화학량론은 반응이 끝까지 간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반응은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생성물이 다시 반응물로 돌아가는 가역 반응(reversible reaction)이기 때문이죠. 밀폐 용기에서 정반응이 진행되면 반응물이 줄어 정반응 속도는 느려지고, 생성물이 쌓여 역반응 속도는 빨라집니다. 두 속도가 같아지는 순간부터 농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상태가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입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지만 미시 세계에서는 양방향 반응이 같은 속도로 계속되고 있죠. 붐비는 백화점을 떠올려 보세요. 입장객과 퇴장객 수가 같으면 안의 인원은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평형에서 반응물과 생성물의 농도 비를 정리한 값이 평형 상수 K이고, K가 크면 생성물 쪽으로 많이 기운 평형입니다.
르샤틀리에 원리: 평형은 교란에 저항한다
그렇다면 평형에 있는 계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프랑스의 화학자 르샤틀리에(Henri Le Chatelier)는 1884년에 예측 규칙을 내놓았습니다. 평형에 교란을 가하면, 계는 그 교란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해 새 평형에 도달한다. 농도를 높이면 그 물질을 소모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높이면 기체 분자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온도를 올리면 열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원리는 계산 없이도 평형의 반응 방향을 예측하게 해 주는 강력한 어림 규칙입니다. 다만 만능은 아니어서 촉매는 평형을 전혀 움직이지 못합니다. 촉매는 양방향 속도를 똑같이 높여 평형에 도달하는 시간만 줄이죠.
평형을 다루는 기술: 공장에서 핏속까지
2강의 하버-보슈 공정은 르샤틀리에 원리의 교과서적 응용입니다. N₂ + 3H₂ ⇌ 2NH₃ 반응은 기체 4분자가 2분자로 줄어드는 발열 반응입니다. 그래서 고압은 암모니아 쪽으로 평형을 밀어 주지만, 발열 반응이므로 고온은 오히려 평형을 반응물 쪽으로 되돌립니다. 그런데 저온에서는 속도가 너무 느리죠. 산업 현장은 결국 평형(낮은 온도가 유리)과 속도(높은 온도가 유리) 사이에서 약 400~500℃, 수백 기압의 타협점을 골랐고, 생성된 암모니아를 계속 뽑아내 평형이 쉬지 못하게 만듭니다.
생명도 같은 기술을 씁니다.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가역적으로 결합합니다. 산소 농도가 높은 폐에서는 평형이 결합 쪽으로 기울어 산소를 싣고, 산소가 희박한 근육 조직에서는 평형이 해리 쪽으로 이동해 산소를 내려놓죠. 결합이 비가역적이라면 운반이 아니라 저장이 되어 버립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 치명적인 이유는 CO가 헤모글로빈과 산소보다 훨씬 강하게 결합해 이 섬세한 평형을 통째로 점거하기 때문입니다.
열역학과의 연결: 평형은 어디서 오는가
평형의 위치를 정하는 더 깊은 원리는 열역학에 있습니다. 반응의 자발성을 재는 양인 깁스 자유 에너지(Gibbs free energy) 변화 ΔG가 음수인 방향으로 반응은 진행하고, ΔG가 0이 되는 지점이 바로 평형입니다. 평형 상수 K는 표준 자유 에너지 변화와 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열역학 데이터만으로 반응이 어디까지 갈지 계산할 수 있습니다. 속도(2강)는 언덕의 높이가, 평형(이번 강)은 골짜기의 깊이가 정한다는 구분이 화학 전체를 관통하죠. 다음 강에서는 이 틀 위에서 산염기와 산화환원 반응을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