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과 분자 2강. 분자의 모양이 성질을 만든다
화학식은 재료 목록일 뿐입니다. 분자가 무엇을 하는지는 3차원 모양이 결정하죠.
풀고 시작
전자쌍은 서로를 밀어낸다
분자의 모양을 예측하는 도구는 놀랄 만큼 단순합니다. 전자쌍 반발 이론(VSEPR, Valence Shell Electron Pair Repulsion)은 중심 원자 둘레의 전자쌍들이 모두 음전하라서 서로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는 한 가지 원리만 씁니다. 1957년 캐나다의 길레스피(R. Gillespie)와 나이홀름(R. Nyholm)이 체계화한 이 이론은 풍선 묶음으로 시연할 수 있습니다. 풍선 두 개를 묶으면 일직선, 세 개면 평면 삼각형, 네 개면 사면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죠. 전자쌍도 똑같습니다. CO₂는 중심 탄소에 전자 영역이 둘이라 직선형(180°), BF₃는 셋이라 평면 삼각형(120°), CH₄는 넷이라 정사면체(109.5°)가 됩니다. 종이에 평면으로 그리던 분자들이 사실은 저마다의 입체를 갖는 겁니다.
물은 왜 굽었는가
물의 산소는 수소 둘과 결합하고도 비공유 전자쌍(lone pair) 두 개를 더 갖습니다. 전자 영역은 넷이므로 뼈대는 사면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원자 배치는 꼭짓점 두 개가 비어 있는 굽은 모양입니다. 게다가 비공유 전자쌍은 한 원자에만 묶여 있어 공간을 더 넓게 차지하고 더 세게 밀어내죠. 그래서 결합각은 사면체각 109.5°에서 눌린 104.5°가 됩니다. 같은 원리로 비공유 전자쌍이 하나인 암모니아 NH₃는 107°의 삼각뿔이 되죠. 각도 몇 도의 차이가 사소해 보이시나요? 물의 경우 이 굽음이 지구 생명의 조건을 만듭니다.
굽은 모양의 결과: 극성
산소는 수소보다 전자를 훨씬 세게 끌어당깁니다(전기음성도 3.44 대 2.20). 그래서 O-H 결합의 전자는 산소 쪽으로 치우치고, 산소는 약한 음전하, 수소는 약한 양전하를 띠죠. 여기서 모양이 결정타입니다. CO₂도 결합 하나하나는 치우쳐 있지만 분자가 직선이라 양쪽 치우침이 정확히 상쇄되어 무극성 분자입니다. 물은 굽어 있어서 치우침이 상쇄되지 않고 분자 전체가 음극과 양극을 가진 극성 분자가 되죠. 결합의 극성과 분자의 극성은 다른 층위이며, 그 사이를 모양이 매개합니다. 극성 여부는 무엇이 무엇에 녹는지, 끓는점이 얼마인지를 좌우합니다(3강과 4강의 주제입니다).
모양이 기능을 결정한다
이 원리는 화학을 넘어 생물학의 문법이 됩니다. 코를 자극하는 냄새 분자는 후각 수용체 단백질의 홈에 끼워질 때 신호를 냅니다. 수용체가 읽는 것은 분자의 화학식이 아니라 모양과 전하 분포죠. 효소가 특정 기질만 골라 반응시키는 것도 같은 원리이며, 1894년 화학자 에밀 피셔(Emil Fischer)는 이를 자물쇠와 열쇠에 비유했습니다. 약이 듣고 안 듣고, 단백질이 접히고 못 접히고가 모두 분자 모양의 문제입니다. 생물학 서가에서 효소와 수용체를 다룰 때 이 강의 그림을 다시 꺼내게 될 겁니다. 다음 강에서는 극성이 만들어내는 분자들 사이의 힘을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오른손과 왼손처럼 거울상으로만 다른 두 분자가 있다면, 우리 몸은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